외면일기
-
연애와 스타킹無序錄 2013. 5. 16. 00:39
끝나버린 연애는 올 나간 고급 스타킹일지 모른다. 모든 사물과 관계를 처음 맺는 건 잊을 수 없는 경험이다. 신선한 커피콩을 빻아, 끓는 물을 부었을 때 나는 첫 향기. 포장을 뜯고 처음 살갗에 닿는 팽팽한 느낌의 스타킹. 이런 신선함은 절대 잊을 수 없다. 뜨거운 물이 커피에 닿고, 머핀이 부풀어 오르면 그 공간은 금세 커피 향으로 가득차게 된다. 어쩐지 늘어지고, 부어있는 것 같은 느낌의 다리도 새 스타킹을 신으면 금세 탄력을 되찾는다. 연애, 사랑의 시작도 그렇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사랑에 빠지는 일은, 고급 스타킹의 포장을 뜯고 처음 신었을 때처럼 탱탱한 탄력으로 일상을 감싸는 것과 같다. 분쇄한 커피 가루에 물을 막 떨어뜨리면 순식간에 부풀고, 향기가 빠짐없이 퍼지듯이 생활의 모든 곳에 연애..
-
SNS와 한림별곡無序錄 2013. 5. 16. 00:38
- 한림제유 元淳文 仁老詩 公老四六李正言 陳翰林 雙韻走筆沖基對策 光鈞經義 良鏡詩賦위 試場ㅅ 景 긔 엇더하니잇고.葉 琴學士의 玉筍門生 琴學士의 玉筍門生위 날조차 몃 부니잇고.유원순의 문장, 이인로의 시, 이공로의 사륙변려문,이규보와 진화의 쌍운을 맞추어 써 내려간 글,유충기의 대책문, 민광균의 경서연구, 김양경의 시와 부.아, 이들이 모두 모여 시험을 치는 광경, 그것이 어떠합니까?금의가 배출한 죽순같이 많은 제자들.아아, 나까지 몇 사람이겠습니까!唐漢書 莊老子 韓柳文集李杜集 蘭臺集 白樂天集毛試尙書 周易春秋 周戴禮記위 註조쳐 내 외온ㅅ 景 긔 엇더하니잇고.葉 大平廣記 四百餘卷 大平廣記 四百餘卷위 歷覽ㅅ 景 긔 엇더하니잇고.당서와 한서, 장자와 노자, 한유와 유종원의 문집,이백, 두보의 시집, 난대영사(令使..
-
폰(pawn)의 프로모션無序錄 2013. 1. 25. 16:16
체스에서 최강자는 퀸queen이다. 사방으로 체스판을 가로지른다. 앞에 장애물이 없다면, 맞은 편의 끝까지 단숨에 닿을 수 있다. 최후방에서 넓게 바라보다가, 언제든 상대편에 빈틈이 보이면 최전방에 나설 수 있는 힘까지 있다. 넓은 시야와 기동력, 퀸이 체스판의 최강자가 될 수 있는 덕목이다. 하지만 퀸 혼자 64개의 칸을 모두 메울 수는 없다. 그렇게 강력하고 완벽해보이는 능력자에게도 헛점이 있고, 빈틈이 있다. 나이트knight는 바로 이렇게 퀸이 놓치는 칸을 파고든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편 퀸의 시선을 피해서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때로는 암살하는 역할까지 한다. 나이트의 움직임은 일반적인 체스판 위의 말들과는 다르다. 보통의 경우라면, 오로지 앞으로만 간다든가 사선으로만 움직인다. 예측 가능한 ..
-
그림과 조각의 해석문학 잡설 2012. 12. 28. 03:09
그림 그림은 평면을 점과 선으로 나누고 색으로 채운다. 찍힌 점 하나나 선 하나에 화가의 의도가 담긴다. 의도를 담지 않은, 우연한 표현이라고 말하더라도 '그러한 의도'를 담고 있게 된다. 어떤 그림이든 완성되면, '해석 대상'이 된다. 큐레이터의 시선이든, 중학생의 시선이든 간에 해석이 작동하게 된다. 그림의 분위기를 보거나, 어떤 배경, 어떤 사람들이 망막에 닿는 순간, 해석의 문제로 넘어간다. 그림은 대체로 완결된 '전경figure과 배경ground'을 갖고 있다. 음울한 배경에 거친 황소 한 마리가 있을 수도 있고, 한적한 공원에 한가롭게 누워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관람객들은 주로 그림을 보며, 어디에서 누가 무얼 하고 있는가―하는 것을 보며 자신의 기억을 더듬는다. 관람객은 그림을 보면..
-
우유 탄산음료와 잡소리無序錄 2012. 12. 25. 01:04
프로이트, 프뢰벨, 헤르바르트가 내 목을 마르게 한다. 에라, 나는 몸을 두 다리에 얹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공사중인 휴게실 옆에 낯설게 서 있는 자판기 무리를 보며 잠시 고민에 빠져든다. 일단, 나는 목이 마르다. 커피는 마시고 싶지 않고, 카페인 음료도 되도록 피하고 싶다. 땀은 몸에서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이상한 믿음이라고 이상하게 째려보는 친구들에게 나는 변명한다. 뇌도 목이 마르고, 뇌에서도 땀이 난다고. 어쨌든, 다시 파란색의 자판기 몸통 앞에 서서 가만히 눈싸움을 벌인다. 그러던 사이에, 나의 세계를 부수고 음료수 상자가 말을 했다. "지금 고르지 않을 거면, 잠깐만 비켜주세요." 상자 뒤에 아저씨가 내 공간으로 들어왔다. 나는 비켜서서 포카리 스웨트를 마시려던 생각을 밀어 ..
-
토막글로 기워 만든 조각보 no.2無序錄 2012. 10. 21. 01:07
글을 쓰고 싶은데 잘 써지지 않는 건 고문이다. 갑자기 손끝에 신내림이 올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글쓰기는 노동에 가까웠다. 이백의 콧노래가 아닌, 두보의 탄식에 가깝다. 여전히 읽고 쓰는 일을 계속하고 있지만, 예전만큼 쓰기에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있다. 단순한 삶에서 자극을 받기란 쉽지 않다. 눈 뜨면 문법과 문학, 교육학을 보는 상황에서 주어지는 자극이란, 그저 옛날 사람들과의 대화 뿐이다. 그리고 장마 덕분에 쉬지 않고 변하는 날씨 정도. 2012. 7. 11208년 삼국지의 적벽대전은 사실과 역사로 남았다.880년 경 신라의 '처용'은 전설로 남았다.같은 시간에 살더라도 인식의 차이가 있다면 다른 세계에 있는 것과 같다. 2012. 7. 13웨딩드레스를 입은 아내는 생크림으로 빚은 인형처럼 싱그..
-
토막글로 기워 만든 조각보 no.1無序錄 2012. 10. 18. 08:00
요즘은 공부한다는 핑계로, 그간 읽던 종류의 책들을 잠시 밀어둔 상황. 그 덕분에 블로그에 정리된 생각을 쓸 겨를도 없었고, 그 덕분에 자꾸만 SNS에 메모처럼 생각의 토막들만 던져놨다. 가끔, 내가 무슨 책을 읽었더라, 어떤 부분이 중요한 내용이었나―하고 내가 쓴 글을 찾아서 다시 볼 때가 있다. 블로그는 그렇게, 나의 기록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SNS에 글을 쓰면서, 자꾸만 나의 삶과 기억이 닳아버리는 느낌이 엄습했다. 스믈스믈 기어들어와, 몰래 내 삶과 기억을 조금씩 갉아먹으며 살아가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마치 를 괴롭히는 회색 신사처럼. "생각의 토막을 모아, 구멍난 내 기억을 깁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려하고 깊이 있는 문장들은 아니더라도, 자투리 천을 모아 만든 색색깔 조각보는 될 ..
-
커피로 몸과 마음 화해시키기無序錄 2012. 10. 17. 11:05
심한 바람이 창문을 친다. 그 소리가 설핏 멍해진 나를 깨웠다. '커피를 마셔야겠다.' 커피콩이 파사삭 으깨지며 갈리는 소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책상 앞에서 보던 책을 물리고 일어났다. 요 며칠 동안 붙들고 씨름 중인 는 좀처럼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하나의 글자에 뭉쳐진 여러 뜻을 해부하듯 풀어가는 일은 재미있지만, 한 순간에 확 질리는 맛이 있다. 게다가 나는 오늘 내일 일도 잘 모르겠는데, 석가모니의 일은 아승기겁을 말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두 발이 공중에 붕 떠있는 듯한 내용이라 그랬을까. 현실은 괴로운데 마음만 봄을 타는 것 같아 괴로움이 더했다. 설상가상, 현실과 이상의 충돌은 '나'라는 존재에서도 생겨났다. 최근 '버스커버스커'의 노래 때문에 마음은 제대로 4월을 타고 둥실거리기 시작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