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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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와 축성無序錄 2012. 10. 15. 07:30
현대의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분야의 공부를 한다는 것은 "축성(築城)"과 관련이 깊다. "정리의 기술"과 "굳건한 성벽"의 유지가 오늘날 공부의 주된 기술이다. 공부 정리의 기술은 '압축과 복원'의 시각에서 설명할 수 있다.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이 담긴 10장짜리 내용을 두 어절 내외로 압축하는 것이 첫 번째 일이다. 두 번째 일은 그 분야의 일을 하는 사람이 압축된 말을 했을 때, 순식간에 10장짜리 내용으로 복원해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압축, 정리, 색인, 복원하는 일을 기본으로, 얼마나 많은 압축 개념을 기억, 결합, 배치하느냐 하는 것에 공부―축성의 재료 마련―의 성패가 달려있다. 공부의 이러한 측면에는 '시간'과 '노력'이 소모되기 때문에,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소모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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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생애주기별 의사소통기술 습득과정無序錄 2012. 10. 14. 02:04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욕구를 표현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보통 쉽게 여기는 '듣기'는 힘들여 배워야 하는 기술이다. 친구들과 왁자지껄 대화를 하다가 문득 공허해지는 것을 느낀다. 아마도 그 이유는 각자 듣기보다 말하기를 우선하기 때문일 것이다. 말은 많이 했지만 공감대를 이루지 못하면, 계속 먹어도 항상 배고픈 아귀처럼 말만 고파진다. 주변을 둘러보면, 대체로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경청하는 사람'이다. 얼마나 듣기를 잘하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보인다. '어른스러운 아이'에서부터 '어른다운 어른'을 넘어, '어르신'까지. 그러다가 부처님과 수제자 가섭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말이 필요없음을 깨닫게 되는 듯싶다. 그저 조용히 꽃 한 송이만 들어 보이는 것으로, 서로가 그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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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0. 26. 재보선 / 허균의 호민론無序錄 2011. 12. 31. 15:37
천하에 두려워할 대상은 오직 백성뿐이다. 백성은 홍수나 화재 또는 호랑이나 표범보다도 더 두려워해야 한다. 그런데도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업신여기면서 가혹하게 부려먹는데 어째서 그러한가? 이미 이루어진 것을 함께 즐거워하고 늘 보아 오던 것에 익숙하여, 그냥 순순하게 법을 받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람은 항민(恒民)이다. 이러한 항민은 두려워할 것이 없다. 모질게 착취당하여 살가죽이 벗겨지고 뼈가 부서지면서도 집안의 수입과 땅에서 산출되는 것을 다 바쳐서 요구에 이바지하느라, 혀를 차고 탄식하면서 윗사람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원민(怨民)이다. 이러한 원민도 굳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자취를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 마음을 품고서, 세상을 흘겨보다가 혹시 그 때에 어떤 큰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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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싫은 사람과 마냥 좋은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無序錄 2011. 12. 31. 15:35
얼굴만 봐도 기분나쁜 사람이 있고, 목소리만 들어도 기분좋은 사람이 있다. 이상한 일이다. 거창하게 심리학 이론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누구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냥 싫은 사람과 마냥 좋은 사람은 몇 가지 뚜렷한 차이가 있다. 요즘 사회에서는 사람을 뽑을 때 증명할 수 있는 기준을 요구한다. 구직자들이나 학생들은 기를 쓰고 자신의 스펙(specification : 제원, 사양)을 올리기 위해 노력한다. 토익, 학점, 공모전 수상 따위로 자신의 능력을 수치나 이력으로 증명하기 위해 뛰어다닌다. 사기업의 경우엔 그렇고, 공기업이나 공무원 시험은 약간 다르긴 하지만 '능력의 수치화'가 선발의 관건인 건 부정할 수 없다. 아쉽다. 그렇게 똘똘한 인재들을 뽑아서 회사는 잘 굴러가고 있을까. 사람을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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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찾기 위한 노력―경제 기반 변천사無序錄 2011. 12. 31. 15:32
조금씩 확신하게 되는 게 있다. 내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결코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어떤 한 분야가 갑자기 보다 높은 차원으로 진보하지도 않는다는 생각이다. 물론 다른 누군가가 비슷한 말을 했겠지만, 아직 읽지 못했다. 지금 발을 디디고 있는 공간과 순간만 살펴보면 변화를 알아채기 어렵다. 변화는 혁명처럼 순식간에 달라지는 것보다 풍화, 퇴적, 침식같이 오랜 시간의 축적으로 달라지는 게 더 많은 것 같다. 인류는 지금까지 보다 더 게을러지기 위해 노력해왔다. 생존을 위한 먹이마련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것이, 인류 경제사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수렵, 채취하던 시절은 정말 바쁘게 보내지 않았을까. 매번 끼니마다 뭘 어떻게 구해 먹을지 끝없이 고민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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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와 달리기無序錄 2011. 12. 31. 15:26
걷기 - 생각을 낳는다. - 숨을 고른다. - 땅을 느낀다. - 주변을 돌아본다. - 타인에게 눈길이 간다. - 다감각, 다운동이 동시 가능하다. - 정적이다. 달리기 - 생각을 잊는다. - 고민을 고른다. - 공기를 느낀다. - 나를 돌아본다. - 세상이 뒤로 밀린다. - 한 가지 감각, 운동만 가능하다. - 동적이다. "걷는다"는 움직임은 정말 생산적인 일이다. 천천히 걸음을 내딛으며, 한 걸음에 한 마디의 생각을 한다. 발걸음은 하나의 발자국을 만들어 낼 때마다 땅을 느끼고, 자극을 받는다. 돌멩이의 자극이 신발을 지나 발바닥과 발가락을 간질이고, 걷다가 눈에 드는 뜰꽃은 뇌를 자극하는 향신료가 된다. 걸어가는 일은 그 자체로 그치는 법이 드물다. 산책을 해도 땅을 느끼고, 주변을 둘러보고 대화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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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손전화의 존재의미에 대하여無序錄 2011. 12. 31. 15:21
멀리 생소한 산을 넘어 새소리조차 시끄럽게 들리는 골짜기에 들어간 시간. 그 적막함은 단 한 개의 점을 통해 떠나온 세상과 이어지고 있다. 7개의 무지갯빛 막대―빨주노초파남보―모두 선명하게 떠오르면, 이리스가 소식을 전해주러 내려온 것처럼 내 마음도 가볍다. 11개의 숫자와 한 번의 통화 버튼을 누르는 손동작도 내 마음처럼 가볍다. 화창한 화요일 오후, 여전히 맑고 밝은 하늘에서 무지개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주머니에서. 무지개다리가 사라졌다. 그토록 무거웠을까. 세상과 나를 잇는 보이지 않는 선이. 온몸을 전율하며 사랑이 담긴 쪽지를 전하는 주머니 속 작은 새가. 내 품을, 내 손을 벗어나는 게 그토록 크고 무거운 일이었을까. 손전화는 홀로 있지 못한다. 아무것도 아니다. 손전화를 붙들고 있는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