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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로 몸과 마음 화해시키기無序錄 2012. 10. 17. 11:05심한 바람이 창문을 친다. 그 소리가 설핏 멍해진 나를 깨웠다.'커피를 마셔야겠다.'커피콩이 파사삭 으깨지며 갈리는 소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책상 앞에서 보던 책을 물리고 일어났다. 요 며칠 동안 붙들고 씨름 중인 <월인석보>는 좀처럼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하나의 글자에 뭉쳐진 여러 뜻을 해부하듯 풀어가는 일은 재미있지만, 한 순간에 확 질리는 맛이 있다.게다가 나는 오늘 내일 일도 잘 모르겠는데, 석가모니의 일은 아승기겁을 말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두 발이 공중에 붕 떠있는 듯한 내용이라 그랬을까. 현실은 괴로운데 마음만 봄을 타는 것 같아 괴로움이 더했다. 설상가상, 현실과 이상의 충돌은 '나'라는 존재에서도 생겨났다.최근 '버스커버스커'의 노래 때문에 마음은 제대로 4월을 타고 둥실거리기 시작했지만, 몸은 묵은 겨울을 아직 품고 있어서 그런지 그 뻐근함이 마음을 내리누르는 시점이 겹쳤다. 이 충돌은 사춘기 이래로 계속해서 나의 4월을 괴롭힌다.케냐에서 재배하고, 강릉의 어느 커피 장인이 볶은 커피콩 40g을 핸드밀에 넣는다. 그르릉―그릉거리며 돌아가는 기계의 압력에 콩은 이기지 못하고 소리를 지른다. 타―그락―탁틱. 어떤 녀석은 덮개가 없다는 틈을 타서 과감하게 위로 튀어 오른다. 어쨌든 모두 곱게 빻아, 종이 필터에 담는다. 그 위에 뜨거운 물로 샤워―. 빵빵하게 부풀어 오르다, 이내 가라앉아버리는 커피가 나처럼 보였다.집 안에 가득히 커피 향이 퍼지기 시작했다. 문득 이효석의 글이 떠올랐다.벚나무 아래에 긁어모은 낙엽의 산더미를 모으고 불을 붙이면 속의 것부터 푸슥푸슥 타기 시작해서 가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바람이나 없는 날이면 그 연기가 얕게 드리워서 어느덧 뜰 안에 가득히 담겨진다. 낙엽 타는 냄새 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갓 볶아 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낙엽을 태우면서>1930년대 일제시대의 수필. 고등학교 다닐 적에 이효석의 수필을 읽으며 분노했다. 그토록 힘들었던 일제 시대에 한 사회의 지성인이 겨우 한다는 게 '낙엽을 태우면서 갓 볶아 낸 커피의 냄새'를 운운하는 것일까―하면서. 십여 년이 훌쩍 지난 오늘, 커피 한 잔 마시며 그를 다시 생각한다. 대학에서 다시 배우고 읽은 이효석은 내 분노를 부끄러움으로 돌려놓았다. 불합리와 폭력으로 가득한 세상에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눈길을 돌렸고, 문학을 이뤄냈다.2012년 4월 4일. 나는, 겨우 글을 읽고 쓰며 밥벌이를 하기 위한 준비만 하고 있었다. 수필을 읽으며 분노했던 나도 사라졌고, 부끄러워하던 모습도 어렴풋해졌다. 바닥에 두 발을 딛지 못하고 몇 센치쯤 허공에 떠서 허우적거리는 느낌이 엄습했다. 그런 비현실감 때문일까. 유독 커피를 마실 때 즐거운 것은, 커피콩을 손으로 갈고 주전자로 물을 흘릴 때, 현실감을 느끼기 때문인가 싶다.넋두리에 커피 두 잔이 다 비워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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