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序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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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싫은 사람과 마냥 좋은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無序錄 2011. 12. 31. 15:35
얼굴만 봐도 기분나쁜 사람이 있고, 목소리만 들어도 기분좋은 사람이 있다. 이상한 일이다. 거창하게 심리학 이론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누구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냥 싫은 사람과 마냥 좋은 사람은 몇 가지 뚜렷한 차이가 있다. 요즘 사회에서는 사람을 뽑을 때 증명할 수 있는 기준을 요구한다. 구직자들이나 학생들은 기를 쓰고 자신의 스펙(specification : 제원, 사양)을 올리기 위해 노력한다. 토익, 학점, 공모전 수상 따위로 자신의 능력을 수치나 이력으로 증명하기 위해 뛰어다닌다. 사기업의 경우엔 그렇고, 공기업이나 공무원 시험은 약간 다르긴 하지만 '능력의 수치화'가 선발의 관건인 건 부정할 수 없다. 아쉽다. 그렇게 똘똘한 인재들을 뽑아서 회사는 잘 굴러가고 있을까. 사람을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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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과 새로운 준비를 위한 의식無序錄 2011. 12. 31. 15:33
아침에 출근하러 길을 나서면서 하늘을 쳐다봤다. 군에 들어오면서 시작한 하늘 쳐다보기는 어느새 습관이 되어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여름의 태양도 이제 한풀 꺾였고, 언제오나 기다리던 가을이 코 앞까지 찾아 들어와 있었다. 부대전출 명령이 떨어졌다. 소위로 임관해서 이곳에 온지 2년. 동기들의 대부분과 대다수의 후배들은 소대장으로, 대대급 참모로 군생활을 정리할 참이다. 연대 교육장교직을 마무리 하고, 전역 준비를 하려던 순간에 다시 옮겨가라는 명령. 딱 두 가지가 떠올랐다. 여자친구와 커피. 미안했다. 마냥 남자친구 군에 있으니 기다리라는 쿨한 모습을 보이기에는 너무 미안했다. 며칠이나 머릿속이 하얗게 바랬다. 여자친구도 나도. 업무가 일찍 끝난 오전, 숟가락으로 삽질하듯 입으로 밥과 국을 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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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찾기 위한 노력―경제 기반 변천사無序錄 2011. 12. 31. 15:32
조금씩 확신하게 되는 게 있다. 내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결코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어떤 한 분야가 갑자기 보다 높은 차원으로 진보하지도 않는다는 생각이다. 물론 다른 누군가가 비슷한 말을 했겠지만, 아직 읽지 못했다. 지금 발을 디디고 있는 공간과 순간만 살펴보면 변화를 알아채기 어렵다. 변화는 혁명처럼 순식간에 달라지는 것보다 풍화, 퇴적, 침식같이 오랜 시간의 축적으로 달라지는 게 더 많은 것 같다. 인류는 지금까지 보다 더 게을러지기 위해 노력해왔다. 생존을 위한 먹이마련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것이, 인류 경제사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수렵, 채취하던 시절은 정말 바쁘게 보내지 않았을까. 매번 끼니마다 뭘 어떻게 구해 먹을지 끝없이 고민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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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치 한 병에 담긴 주절거림無序錄 2011. 12. 31. 15:29
퇴근 길에 편의점에 들렀다. 대학 다니던 시절, 술은 마시고 싶지만 취하고 싶지는 않아서 마시기 시작한 "후치" 오렌지. 편의점 통로를 서성이며 간식거리를 찾다가 냉장고 앞에서 걸음이 멈췄다. '그래, 오랜만이다. 마시고 편하게 자자.' 홍대 앞 클럽에 드나들며 사마셨던 6~7천원 그 가느다란 것이 삼천 원이다. 세월이 나의 마음까지 갉았나 보다. 싼 것에 눈과 마음이 움직인다. 샴푸와 칫솔, 그리고 후치 오렌지 한 병을 계산한 뒤에 서류 가방에 찔러 넣었다. "안녕히 계세요." 또 언제 볼지 모르는 아르바이터에게 약간의 진심이 담긴 인사를 남기고 문을 닫았다. 집까지 걸어들어가며 옛 생각에 잠겼다. 그저 무턱대고 노래가 좋고 친구가 좋아 밤을 낮 삼아 뛰다니던 그때가 떠올랐다. 톡 쏘는 탄산과 알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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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와 달리기無序錄 2011. 12. 31. 15:26
걷기 - 생각을 낳는다. - 숨을 고른다. - 땅을 느낀다. - 주변을 돌아본다. - 타인에게 눈길이 간다. - 다감각, 다운동이 동시 가능하다. - 정적이다. 달리기 - 생각을 잊는다. - 고민을 고른다. - 공기를 느낀다. - 나를 돌아본다. - 세상이 뒤로 밀린다. - 한 가지 감각, 운동만 가능하다. - 동적이다. "걷는다"는 움직임은 정말 생산적인 일이다. 천천히 걸음을 내딛으며, 한 걸음에 한 마디의 생각을 한다. 발걸음은 하나의 발자국을 만들어 낼 때마다 땅을 느끼고, 자극을 받는다. 돌멩이의 자극이 신발을 지나 발바닥과 발가락을 간질이고, 걷다가 눈에 드는 뜰꽃은 뇌를 자극하는 향신료가 된다. 걸어가는 일은 그 자체로 그치는 법이 드물다. 산책을 해도 땅을 느끼고, 주변을 둘러보고 대화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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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함, 커피에 담그기.無序錄 2011. 12. 31. 15:24
봄입니다. 나긋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던 하루였습니다. 3월에 불던 바람은 아직 겨울이었습니다. 몸과 마음을 굳게 만드는 바람이었습니다. 적어도 내 마음과 또 한 사람의 마음은 꽁꽁 얼어버린 겨울이었습니다. 겨울의 입장에서는 아주 성공적인 한철이었네요. 비가 내렸습니다. 많은 비는 아니지만, 세상에 가득했던 먼지를 닦아줄만큼 내렸습니다. 아스팔트에 닿아 튀어오르고 터지는 빗방울을 보며 생각합니다. 비 비린내가 가득한 종로 거리, 그 거리를 두 손 잡고 천천히 거닐던 시간. 그리고 따뜻한 커피 두 잔과 몇 시간의 행복한 대화. 커피는 내게 아주 특별합니다.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모두 커피를 싫어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함께한 시간이 점점 많아질수록 그들은 나처럼 드립커피를 향해 손을 뻗었고 입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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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손전화의 존재의미에 대하여無序錄 2011. 12. 31. 15:21
멀리 생소한 산을 넘어 새소리조차 시끄럽게 들리는 골짜기에 들어간 시간. 그 적막함은 단 한 개의 점을 통해 떠나온 세상과 이어지고 있다. 7개의 무지갯빛 막대―빨주노초파남보―모두 선명하게 떠오르면, 이리스가 소식을 전해주러 내려온 것처럼 내 마음도 가볍다. 11개의 숫자와 한 번의 통화 버튼을 누르는 손동작도 내 마음처럼 가볍다. 화창한 화요일 오후, 여전히 맑고 밝은 하늘에서 무지개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주머니에서. 무지개다리가 사라졌다. 그토록 무거웠을까. 세상과 나를 잇는 보이지 않는 선이. 온몸을 전율하며 사랑이 담긴 쪽지를 전하는 주머니 속 작은 새가. 내 품을, 내 손을 벗어나는 게 그토록 크고 무거운 일이었을까. 손전화는 홀로 있지 못한다. 아무것도 아니다. 손전화를 붙들고 있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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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으로 가는 길.無序錄 2011. 12. 31. 15:19
비가 내린다. 차창 건너편으로 다른 차가 보인다. 내달리는 바퀴에 물안개가 휘감아 돈다. 고개를 돌려 앞을 봤다. 빗방울이 “투두두둑” 떨어지며 내 신경을 깨운다. 삐걱거리는 와이퍼는 한없이 두 팔을 흔들고 있었다. 지금 나는 서울에서 경상북도 영천으로 시속 100km의 속도로 멀어지고 있다. 만 24년의 내 삶에서 멀어지고 있다. 밤새 뒤척였다. 일찍 잠들려했지만, 심장은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인지 불안인지 모를 기묘한 두근거림으로 나를 괴롭혔다. 예언은 이루어지고 만다. 대한민국 남자로 태어난 나는 오이디푸스였다. 나에게 입대는 오이디푸스에게 내려진 델포이의 신탁과 같은 무게로 다가왔다. 오이디푸스는 운명을 떨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하지만, 결국에는 그 운명의 궤를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