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냥 싫은 사람과 마냥 좋은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無序錄 2011. 12. 31. 15:35
얼굴만 봐도 기분나쁜 사람이 있고, 목소리만 들어도 기분좋은 사람이 있다. 이상한 일이다. 거창하게 심리학 이론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누구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냥 싫은 사람과 마냥 좋은 사람은 몇 가지 뚜렷한 차이가 있다.
요즘 사회에서는 사람을 뽑을 때 증명할 수 있는 기준을 요구한다. 구직자들이나 학생들은 기를 쓰고 자신의 스펙(specification : 제원, 사양)을 올리기 위해 노력한다. 토익, 학점, 공모전 수상 따위로 자신의 능력을 수치나 이력으로 증명하기 위해 뛰어다닌다. 사기업의 경우엔 그렇고, 공기업이나 공무원 시험은 약간 다르긴 하지만 '능력의 수치화'가 선발의 관건인 건 부정할 수 없다.
아쉽다. 그렇게 똘똘한 인재들을 뽑아서 회사는 잘 굴러가고 있을까. 사람을 선발하고 평가하는 기준이 수치화된 스펙으로 족할까. 그 숫자들이 사람 능력의 일부분을 드러내겠지만, 전체적인 부분을 나타낼 순 없을 것이다. 게다가 회사의 인사담당자들은 높은 스펙의 인재가 다른 사람보다 탁월한 업무능력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고 말하고, 조직 융화력 부분도 고개를 갸웃거린단다.
옛날 얘기를 돌아보면, 좀 더 사람을 평가하고 선발하는 본질적인 기준 같은 게 더러 보인다.
신라 화랑제도는 처음에 '원화(原花)'제도로 시작했다. 두 명의 미녀가 각각 젊은이 집단을 맡아 함께 놀면서 그들의 행실을 보고 인재를 선발했던 제도다. 예나 지금이나 남자의 본성을 봉인 해제시키는 좋은 방법인 듯하다. (여자와 함께 술마시고 놀면 남자의 본성을 확인하기 쉽다.)
고려시대의 음서제도는 썩 좋은 것 같지 않으니 제외하고, 광종 때부터 시작해서 조선까지 이어진 과거제도는 꽤 설득력 있던 것 같다. 국가의 정치 철학과 교육내용, 교육과정을 일치시킨 건 대단한 일이다. 다만 시대의 흐름에 잘 적응하지 못한 게 아쉬운 부분이다.
중국 당나라 시절의 인재등용 기준인 '신언서판(身言書判)'은 지금도 유용할 것 같다. 좋은 사람과 싫은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물론 이 네 가지를 기준으로 공직자를 선발한다면 논란이 많겠지만, 사기업에서는 충분이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신(身)은 몸가짐이다. 지하철에서 여성을 더듬는 아저씨를 보면 혐오감이 든다. 식당에서 육상 경기 대회를 하는 어린이들을 만나면 밥 먹다가 체할 것 같다. 오랫동안 씻지 않아서 체취를 풍기는 사람이 옆에 앉으면 피하고 싶다. 반면에, 여배우의 몸에 손대지 않기 위해 손을 오그리는 남자 배우를 보면 호감이 간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꼬망쟁이들이 배꼽인사를 하면 저절로 웃음이 난다. 도서관 옆자리에 은은하고 상쾌한 향을 가진 남자가 앉으면 자꾸 시선이 간다.
언(言)은 말씨다. 이외수 작가는 "인터넷이 생기고부터 돌에 맞아 죽는 사람보다 글에 맞아 죽는 사람이 더 많아졌습니다."라고 한다. 인터넷 게시판은 키보드 워리어가 점령한 영토가 됐다. 거리를 걷거나 대중교통을 타고 있으면 학생들의 욕배틀이 자주 들린다. 좋지 않은 말씨는 그 사람을 그냥 싫게 만든다.
서(書)는 글씨, 문장이다. 한 사람의 향기는 글에서도 묻어난다.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 어떤 성향을 가진 사람인지, 교양 수준이 어떤지 알기 위해서 많은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이 쓴 글 한 쪽이면 충분하다. 판화가 이철수 선생의 작품이나, 신영복 교수의 필체, 가수 이소라 씨의 글씨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이유는 그들의 향기가 사람의 마음을 흔들기 때문일 것이다.
판(判)은 판단력이다. 기업에 취업하기 어려워지면서부터 창의력과 판단력을 요구하는 면접 문제가 많이 출제 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차를 운전해서 가던 길에 버스 정류장에서의 판단 문제라든가, 스위치와 연결된 밀실의 형광등 찾기 따위의 문제 따위. 조선시대는 임금 앞에서 치르던 최종 시험(殿試)의 책문(策問)을 통해 합격자의 판단력을 시험하고, 최종 순위를 매겼다.
천 년 전의 옛날 얘기지만, 사적인 관계를 맺는 사람들은 '술과 여자-남자'를 통해 판단이 가능할 것 같다. 사회에서 공적인 관계를 맺는 사람들 사이의 평가는 '신언서판', 이 네 가지 기준이면 충분할 것 같고. 친구 관계를 맺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생겨난 '그냥 싫은 사람과 마냥 좋은 사람"이 왜 그런지 알고 싶을 때, 여전히 유효한 평가 기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 기준을 자기 마음 속에 품고 노력하면 좋은 일이 있지 않을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