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序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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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로 몸과 마음 화해시키기無序錄 2012. 10. 17. 11:05
심한 바람이 창문을 친다. 그 소리가 설핏 멍해진 나를 깨웠다. '커피를 마셔야겠다.' 커피콩이 파사삭 으깨지며 갈리는 소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책상 앞에서 보던 책을 물리고 일어났다. 요 며칠 동안 붙들고 씨름 중인 는 좀처럼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하나의 글자에 뭉쳐진 여러 뜻을 해부하듯 풀어가는 일은 재미있지만, 한 순간에 확 질리는 맛이 있다. 게다가 나는 오늘 내일 일도 잘 모르겠는데, 석가모니의 일은 아승기겁을 말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두 발이 공중에 붕 떠있는 듯한 내용이라 그랬을까. 현실은 괴로운데 마음만 봄을 타는 것 같아 괴로움이 더했다. 설상가상, 현실과 이상의 충돌은 '나'라는 존재에서도 생겨났다. 최근 '버스커버스커'의 노래 때문에 마음은 제대로 4월을 타고 둥실거리기 시작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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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와 축성無序錄 2012. 10. 15. 07:30
현대의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분야의 공부를 한다는 것은 "축성(築城)"과 관련이 깊다. "정리의 기술"과 "굳건한 성벽"의 유지가 오늘날 공부의 주된 기술이다. 공부 정리의 기술은 '압축과 복원'의 시각에서 설명할 수 있다.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이 담긴 10장짜리 내용을 두 어절 내외로 압축하는 것이 첫 번째 일이다. 두 번째 일은 그 분야의 일을 하는 사람이 압축된 말을 했을 때, 순식간에 10장짜리 내용으로 복원해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압축, 정리, 색인, 복원하는 일을 기본으로, 얼마나 많은 압축 개념을 기억, 결합, 배치하느냐 하는 것에 공부―축성의 재료 마련―의 성패가 달려있다. 공부의 이러한 측면에는 '시간'과 '노력'이 소모되기 때문에,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소모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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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생애주기별 의사소통기술 습득과정無序錄 2012. 10. 14. 02:04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욕구를 표현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보통 쉽게 여기는 '듣기'는 힘들여 배워야 하는 기술이다. 친구들과 왁자지껄 대화를 하다가 문득 공허해지는 것을 느낀다. 아마도 그 이유는 각자 듣기보다 말하기를 우선하기 때문일 것이다. 말은 많이 했지만 공감대를 이루지 못하면, 계속 먹어도 항상 배고픈 아귀처럼 말만 고파진다. 주변을 둘러보면, 대체로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경청하는 사람'이다. 얼마나 듣기를 잘하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보인다. '어른스러운 아이'에서부터 '어른다운 어른'을 넘어, '어르신'까지. 그러다가 부처님과 수제자 가섭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말이 필요없음을 깨닫게 되는 듯싶다. 그저 조용히 꽃 한 송이만 들어 보이는 것으로, 서로가 그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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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江건너기無序錄 2012. 5. 26. 19:20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은 전혀 알 수 없다. 어제는 아내 퇴근길에 같이 장을 보고 돌아왔는데, 함께 얘기를 하다가 직장 동료의 집안 내력에 대해 말이 나왔다. 그 집 어른들 중에는 뇌졸중으로 돌아가신 분들이 많았다고 했다. 그런데 최근에 큰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상심하며 있던 차에 어른 중에 또 한 분이 뇌졸중으로 돌아가셔서 같은 장례식장 위-아래층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얘기를 했다. 아내와 함께 탄식을 하며, '인생 한순간이구나'를 연방 내뱉었다. 그러다 오늘, 가사 작품을 읽다가 에 문득 눈에 걸리는 구절이 있었다. "우리 님 가신 後는 므슴 弱水 가렷관대, 오거니 가거니 소식조차 그첫는고" 가만히 누우면 몸이 둥둥 뜨는 사해(死海)와는 반대로, 약수(弱水)는 부력이 없어서 나뭇잎조차 가라앉는다는 전설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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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2. 13 밤, 아이유를 보다 부끄러워졌다.無序錄 2011. 12. 31. 15:40
2011. 12. 13, 에 "아이유"가 나왔다. 왠지 사람의 결이 곱다-라는 느낌을 받았던 터라, 그의 이야기를 쭉 들었다. 즐거웠던 이야기부터 힘든 시간들, 그리고 지금과 앞으로의 소망까지. 방송이라 꾸밈이 있지 않을까-라고 의심하기조차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맑게 느껴졌다. 18살을 넘기면 모든 사람의 기본적인 지적 능력은 같다고 생각한다. 다만 사람들의 차이는, 성품의 타고난 결과 닦음의 노력 차이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를 돌아보게 됐다. 그와 나는 10년의 거리가 있다. 그런데 조약돌처럼 반질거리는 그의 결을 볼수록 내가 부끄러워진다. 품성의 결은 책을 많이 읽었다고, 더 많은 세월을 겪어냈다고 고와지는 게 아니라는 걸 다시 깨닫게 된다. 나의 20대는 이제 18일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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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의 준비와 기본기에 대하여無序錄 2011. 12. 31. 15:39
논술은 고등사고력을 평가할 수 있는 도구입니다. 잘 만들어진 선택형 문제도 고등사고력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다만, 논술은 글을 읽고, 질문에 대한 답을 쓴다는 점에서 더 다양한 능력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보통 우리나라 학생들은 문제를 읽고 4~5개의 답지에서 답을 골라내는 문제에 익숙합니다. 게다가 자신의 생각을 한 편의 글로 써본 경험이 적기 때문에, 논술에 대해 막연한 부담감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처럼 수능이 끝난 시점부터 논술학원이 흥행하는 것이겠지요. 정말 큰 문제는 논술에 '정답이 없다'는 겁니다. 다른 평가 도구와는 다르게 논술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출제자가 제시한 질문과 자료를 읽고, 스스로 판단을 하고 주장을 만들고 근거를 찾아서 알기 쉽게 표현하는 과정입니다. 훈련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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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0. 26. 재보선 / 허균의 호민론無序錄 2011. 12. 31. 15:37
천하에 두려워할 대상은 오직 백성뿐이다. 백성은 홍수나 화재 또는 호랑이나 표범보다도 더 두려워해야 한다. 그런데도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업신여기면서 가혹하게 부려먹는데 어째서 그러한가? 이미 이루어진 것을 함께 즐거워하고 늘 보아 오던 것에 익숙하여, 그냥 순순하게 법을 받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람은 항민(恒民)이다. 이러한 항민은 두려워할 것이 없다. 모질게 착취당하여 살가죽이 벗겨지고 뼈가 부서지면서도 집안의 수입과 땅에서 산출되는 것을 다 바쳐서 요구에 이바지하느라, 혀를 차고 탄식하면서 윗사람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원민(怨民)이다. 이러한 원민도 굳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자취를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 마음을 품고서, 세상을 흘겨보다가 혹시 그 때에 어떤 큰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