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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 이권우비문학 2012. 1. 4. 01:21
- 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 국내도서>인문
- 저자 : 이권우
- 출판 : 그린비출판사 2008.08.25
인상깊은 구절
글을 볼 때는 모름지기…… 마치 칼이 등 뒤에 있는 것처럼 해야 한다. -p.34 <주자어류>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책 읽기. 다른 사람들은 왜 책을 읽을까. 책은 무슨이유로 읽는 걸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책을 잘 읽지 않는다던데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왜 읽지 않는 걸까. 어떤 이유로 사람들은 책을 멀리하게 된 걸까. 여전히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했지만, 이 책을 읽고 약간의 답을 얻은 느낌이다.
내가 책을 읽기 시작한 건 순전히 시간 때우기에서 기인한다. 고등학교 다닐 적에는 컴퓨터에 미쳐 살았다. 그때도 명색이 문예부 일원으로서 때때로 시집이나 소설을 읽곤 했지만, 동아리 활동을 위한 독서 이외에는 거의 컴퓨터만 하고 시간을 보냈다. 컴퓨터도 90% 이상이 게임이었고 놀기 위한 활동이었다. 고 3때까지도 거의 비슷한 나날을 보냈다. 소설은 주로 시험기간에 읽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부분이지 않을까. 시험기간만 되면 왜 그렇게 뉴스와 소설책이 재밌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대학에 들어갔고, 대학 동기들에 비해 한참 모자라는 독서력을 갖고 있다는 게 조금 부끄러워졌다. 전공(중문학 / 국문학) 탓도 있겠지만, 또래 학부 1년생보다 독서량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기분 나쁨. 이 감정이 책 읽기의 도화선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또래에 비해 못하다는 불안감-알랭 드 보통이 얘기했던 status anxiety와 거의 비슷한-에 읽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시간 때우는 행위를 컴퓨터에서 책으로 바꿔갔다.
처음에는 무작정 읽는다. 읽기 쉽고 사전을 뒤적이지 않아도 술술 읽히는 책부터 읽는다. 주로 편안한 분위기의 에세이가 주종이었다. 법정 스님의 글이라든가 피천득의 <인연>, 정채봉의 어른을 위한 동화 따위의 지친 일상에 쉼표가 되는 글이 먼저 손을 탔다. 그 뒤로 전공과 관련된 고전문학을 읽어갔다. 홍길동전, 금오신화, 춘향전 등 우리 고전문학부터 교양시간에 그리스·로마 신화를 배우며 이윤기까지 알아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독서도 괜찮았다. 고전문학을 읽다보니 조금씩 역사가 궁금해졌고, 그래서 읽은 게 남경태가 쓴 역사 교양물이었다. 그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문학과 역사와 철학, 경제와 사회, 종교 따위는 늘 함께 움직인다는 것"을 그 시점에 깨달았다. 그 뒤로 닥치는 대로 읽어갔다. 언어학을 공부하다가 촘스키에 대해 알게 되고, 촘스키의 생각이 궁금해져서 그의 사회과학서를 싸그리 읽어버리고 그 뒤에는 공산주의가 궁금해져서 <마르크스 평전>, <공산주의 선언>을 이어 읽었다. 원시 공산주의 대목에 걸려서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고 난 뒤에 <에밀>을 읽으며 왜 이 사람이 이런 교육방법을 제안했는지 느낌이 오기도 했다.
독서법은 다양하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독서법도 좋은 독법이고, 다치바나 다카시가 얘기하는 독법도 유효하다. 나처럼 쉬운 책부터 시작해서 책의 주제나 사람을 링크해서 읽는 방법도 있다. 사람마다 경험하고 생각하는 게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처럼, 독서법도 다양한 차이가 있기 마련이지 않을까. 다만 자신만의 독서법을 얼마나 명확하게 깨닫고 인지하며, 사용할 줄 아느냐가 중요할 따름이다.
정보화 사회에 진정한 무기는 뭘까. 컴퓨터? 신문? 책? 아마도 진정한 무기는 '정보처리 능력'일 게다.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필요한 것과 쓰레기를 잘 추려내서 쓸모 있는 정보를 만들어 내는 능력. 이게 정보화 사회를 살아가는 인터넷 유목민의 유일한 무기일 것이다. 어떻게 그 무기를 갈고 닦을 수 있을까.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다들 외칠 것 같다. "책을 읽는 것만이 가능하다"고.
책 읽기는 기본적으로 혁명이다. 지금 이곳의 삶에 만족한다면 새로운 것을 꿈꿀리 없다. 꿈꿀 권리를 외치지 않는 자가 책을 읽을 리 없다. 나를 바꾸려 책을 읽는다. 세상을 바꾸려 책을 읽는다. 우리의 삶을 억압하는 체계를 부수고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려 책을 읽는다. 그러하길래 책 읽기는 불온한 것이다. 지배적인 것, 압도적인 것, 유일한 것, 의심받지 않는 것을 희롱하고 조롱하고 딴죽걸로 똥침 놓는 것이다. -p.76
책을 읽는 이유 중에 한 가지 답이 될 수 있을 이야기가 스즈키 코지의 <왜 공부하는가>에 담겨있다.
“미디어가 내보내는 메시지를 비판적으로 읽고 깊이 해석하는 것을 미디어 ‘리터러시’라고 한다. ‘리터러시Literacy’는 ‘학문(교육)이 있음, 읽고 쓰는 능력’이란 뜻이다. …… 무엇을 위해 공부하느냐고 묻는다면, 이해력·상상력·표현력을 높이고 리터러시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수 있다.” -p.21
위의 부분과 글쓴이가 얘기하는 '소비로서 독자 만들기'가 꽤나 설득력이 있다. 우리나라 교육에서 책 읽기보다 문제풀기에 혈안이라는 게 안타깝고 두려운 마음이 들어버리기도 하고.
'소비로서 독자 만들기'
"윗글에 밑줄 친 바가 뜻하는 것 가운데 가장 알맞은 것을 아래에서 골라내라" 중요도도 시험출제자가 매겨 놓고 있고, 그것이 뜻하는 바 가운데 적절한 것도 출제자가 이미 정답이라는 이름으로 정해 놓았다. 거기에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새로운 해석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훌륭하고 고급스러우며 세련된 독자(수용자)를 만들어 내는 데 그칠 뿐이다. 그것은 역시 목적하지 않았지만, 문화자본이 원하는 일을 교육이 해내는 일이 될 수도 있다. -p.214
책을 읽는 이유는 리터러시 능력을 기르고 정보를 흡수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활자를 소비하며 시간을 보내는 고급 소비자가 되기 위함이 아니라 생각하고 판단하고 표현하는 능력을 기르기 위한 트레이닝일 거다. 책을 읽지 않는 이유는 3S 정책과 맞물린 거라고 얘기하면 너무 비약일까?
책 읽기를 권하지 않아도 될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책 좀 그만 읽어! 하고 호통치는 그날이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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