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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 김용석
    비문학 2012. 1. 1. 23:06



    문화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양장)
    국내도서>인문
    저자 : 김용석
    출판 : 푸른숲 201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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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상깊은 구절

    일상은 모든 사람들의 ‘생명의 장(場)’이지만, 또한 일상은 숨어 있다. 그러나 일상이 사람들의 망각의 그늘에서 시들지 않고, 진정한 생명력이 넘치는 시간과 공간이기 위해서는 일상을 사는 것으로 족하지 않고, 일상을 ‘보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p.118

    대중의 이름으로 모든 ‘사람들’을 겨냥하는 ‘사람들의 문화’가 실질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사람들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을 구체적 방식을 찾아내는 것이다. 사람들의 모든 감각에 지속적으로 ‘문화라는 이름’의 메시지를 보내 이른바 ‘문화 활동’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p.304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요즘엔 책을 읽을 시간도, 잠을 깊이 잘 수 있는 시간도, 쉴 수 있는 시간도 모자랐다. 2월 13일 설연휴가 시작되던 날부터 시작된 감기가 한 달이 되어가는 지금도 그 흔적을 지우지 못하고 있고, 갑자기 쏟아지는 업무에 휘둘리다가 주말이 되면 결혼준비를 위해 기차에 몸을 실었기 때문이었다. 시간마다 300km씩 서울로 달려갈 때 조금씩 꼭꼭 씹어 삼킨 책을 이제야 풀어 놓는다.

     

      글쓴이의 책을 처음 접한 건 육군 공병학교에서 교육을 받던 2007년 겨울이었다. 신문을 들춰보다가 동화를 바탕으로 풀어 쓴 철학 이야기가 나왔다는 광고에 충동적으로 구입한 <철학정원>이었다. 동화와 철학의 오묘한 상관관계는 미하엘 엔데 할배에게 조금 배웠지만, 김용석 선생은 본격적인 탐구에 가까웠다.

     

      철학에세이는 때로 정말 버겁다. 철학이 힘든 건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온 마음을 다 쏟아야 하기 때문인 듯하다. 우리가 보통 소설을 읽듯 술렁술렁 읽어버리면 글의 맥을 놓치게 된다. 그러다가 철학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서 점점 멀어진다.

     

      우리는 서로 자기 생각을 '주고 받으며' 이야기의 흐름을 체감한다. 철학적인 글을 읽다가 마주하게 되는 곤란한 상황도 그 흐름을 함께 하느냐, 놓치냐에 달려있다. 철학자가 풀어내는 이야기의 흐름을 좇지 못하면 어느 순간 인쇄된 활자들이 핑그르르 도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철학자가 불친절하다는 느낌도 이 부분에서 생겨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김용석 선생이 써낸 이 책도 마찬가지.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기에 숨이 가쁘지만, 차근차근 대화하는 기분으로 읽어간다면 이 책과 충분히 가까워질 수 있다.

     

      그런데 이 아저씨, 정말 많은 걸 얘기한다. 한 번 읽고 얻어낸 다섯 뿌리는 “시간, 일상, 소통, 문화, 인간”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물론 절대적으로 내 기준이지만.

     

    1. 시  간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궁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셰익스피어, 정약용 한 사람이 이루어낸 업적을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 사람들이 시간의 한계를 초월해서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얼마나 많은 업적을 쌓았을까. '인간은 죽는다'는 삼단논법을 꺼내지 않더라도 한 개인에게 가장 중요한 자원은 '살아 있는 시간'일 것이다.

     

      토플러 할배의 <부의 미래>에서 ‘타임 달러’에 대한 설명을 읽은 기억이 난다. 자신의 시간을 쿠폰처럼 제시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 예를 들면, 반려동물만 두고 7박 8일 간의 해외여행을 가게 된다면, 자신의 '타임 달러'를 이웃에게 지불한다. '타임 달러'를 받은 이웃은 자신의 시간을 할애해서 여행 간 사람의 반려동물을 돌보고, 다음에 자신이 타인의 도움이 필요할 때 가지고 있는 '타임 달러'를 이용하는 방식이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하루라는 시간은 평등하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가 주어진 시간 속에서 속도를 빠르게 함으로써 무언가를 더 이루려 한다. 더 이상 속도는 거리와 시간의 상관관계에서 멈추지 않는다. 생활 속에서 거의 모든 개념과 연결된다. 더 빠르게, 더 효율적으로. 선생은 이 부분을 상식 이상의 단계에서 설명한다.


    속도는 시간에서 탈주하는 것이 아니고 시간 위를 달리는 것일 뿐이다. 시간을 버려야만 시간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며, 그것을 버린 만큼 소중한 것을 얻는다. –p.223 

    흔히 ‘속도와의 전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속도를 앞세워 ‘시간과 전쟁’을 하는 것이다. –p.398

    20세기는 공간 정복의 시대였고 21세기는 시간 정복의 시대일 것이다. –p.398

      김용석 선생의 설명을 듣다 보면, 속도를 추구하는 인간의 노력은 ‘시간 소요를 최소화’해서 어떤 일을 시행하는 데에 소모되는 시간을 줄여 최대한의 삶을 살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연의 자원처럼, 인간의 시간도 같은 개념으로 간주한다.

     

    2. 일  상

     

      일상이란 단어에서 어떤 느낌을 받을까. 내 경우에 일상이란 단어는 편안함과 나른함이 먼저 떠오른다. 너무나도 익숙하고 좀처럼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삶의 궤적과 일치하는 시간의 흐름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눈을 잠깐 돌려보면, 꼭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글쓴이는 조금씩 달라지는 일상의 모습을 차분하게 보여준다.


    현대인들은 과학과 기술의 힘을 빌려 미(美)를 일상화함과 동시에 환상의 세계를 일상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현대의 오락과 놀이 문화는 ‘환상의 세계를 일상화한다’는 목표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놀이 문화의 대명사 디즈니랜드(Disneyland)의 슬로건이 “꿈꿀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현실화할 수 있다(If we can dream it, we can do it)” 라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p.141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 단지 변화의 속도가 인간의 인지 속도보다 한 박자 늦기 때문에 바로 알아채지 못할 뿐이다. 10년 단위로 달라진 일상의 단편을 떠올려 보자. 확연하게 일상이 달라진 걸 느낄 수 있다. 2000년에 핸드폰이 이처럼 기술적으로 발전해서 일상과 뗄 수 없는 한 부분이 되리라 생각할 수 있었을까. 서울 지하철의 판매창구에 사람이 없어지고, 일회용 교통카드로 대체될 것이라 상상할 수 있었을까. 불과 10년 만에 일상은 이렇게 달라졌다.

     

      전자, IT 기술의 진화는 세계를 평평하게 만들었고, 시간을 아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중이다. 전 세계의 모든 언론은 iPhone과 블랙베리(black berry), 안드로이드(android)를 찬양하며 새로운 가능성을―생활의 편리함이든, 새로운 시장의 개척이든―가늠하고 있다.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 밝은 곳이 있다면 어두운 면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김용석 선생은 이 부분을 놓치지 않는다.


    전지구화(glovalizing), 탈중심화(decentralizing), 분권화(empowering)와 함께, ‘조화 이루기(harmonizing)’는 오늘날 사이버 문화를 주창하는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과제이다. 조화의 양면성, 즉 ‘떨어져 있음’과 ‘함께 있음’ 중에서 앞으로 네트워크의 밀도가 높아지는 세계에서 문제가 될 것은 오히려 ‘함께 있음’이 지나칠 가능성이다. –p.203

      이미 ‘함께 있음’이 지나쳐서 생긴 사건은 많다. 기업에서 고객 관리를 목적으로 수집한 개인정보가 노련한 해커들이 빼내어 사용하기도 하고, 미니홈피나 블로그에 올려 둔 사진이나 인터넷 쇼핑 사이트에 올려 둔 상품평들은 구글(google)에서 조금만 노력하면 개인의 거의 모든 정보를 수집할 수도 있게 됐다. 계속해서 사람들은 블로그와 미니홈피에 자신의 정보를 가없이 공개하고 있다. 2PM의 박재범 군과 같은 경험을 자신이 겪지 말란 법도 없다.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 변화는 필수다. 재핑(zapping)으로 하나의 상징을 삼을 수 있을 만큼 TV는 쉴새 없이 1초 간격으로 채널이 바뀌고, 기업에서는 매일 진보하는 사람을 원한다. 새로운 기술의 개발은 늘 장려되며, 개혁과 혁신은 약간 위험하지만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과연 변화는 어디에서부터 올까. 현대의 종교가 되어버린 과학과 기술은 인류의 확실한 만능열쇠가 될 수 있을까. 선생의 우려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더구나 오늘날에는 생산이 기술 개발과 발명이라는 훈장으로 미화되기 때문에 사회적 비판의 화살을 쉽게 피할 수 있는 것이다. –p.104 

    오늘날의 인류는 과학과 기술이 주는 혜택을 만끽하는 만큼 부작용도 감수해야 하며, 그 부작용의 해결도 현재로서는 과학과 기술의 개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역사의 종말은 사회 현상의 변화나 전쟁 같은 정치적 대변혁에서보다 과학 발전의 중지에서 일어날지도 모른다. –p.249

    ‘변해야 산다’는 말은 현시대에서 생존을 위한 모토이기도 하지만, 변화 자본의 경영자들이 그들 상품(단순히 물질적 제품만이 아니고 넓은 의미에서)의 소비자들을 의식적으로 훈련시키고 변화가 습관이 되도록 하기 위해 사용하는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이른바 지식 경영자들의 상당수 임무도 지식으로 변화를 창출하기 위한 것이다. 무엇인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변화시키고 있다. –p.396

      선생은 다시 해결방법을 모색하고 권유한다. 변화의 흐름을 깨닫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는 대로 자신을 떠내려가게 하지 말고 인생의 중심에 서서 일상의 관찰자, 일상의 시인(詩人)이 되어 일상의 조감도를 그려보기를 권한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소외시키는 작업은 때때로 엄청난 발견을 하게 해준다.


    조감도를 그리기 위해서는 날아야 한다. 그러나 지난 십수 년 동안 아무도 날지 않은 것 같다. ‘중력으로부터의 이탈을 시도’하는 표현이 지난 몇 년 동안 ‘튀자’, ‘뜨자’였을 뿐이다. 누가 ‘날자’라는 표현을 들어보았는가? 표현만 없었던 것이 아니다. 아무도 날지 않았다. 튀거나 뜨기의 시도는 상황의 노예가 됐기 때문이다. 상황을 관찰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 자기만 어떻게 해보자는 시도가 난무했을 뿐이다. –p.401

     

    3. 소  통

     

      사람 사이에 생긴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는 대화다.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얘기를 아무런 곡해 없이 전달하고, 이해할 수 있다면 세상에 전쟁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바벨탑 이야기처럼 전 인류가 합심해서 신의 권능에 도전할 수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나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고, 1:1로 번역이 되지 않기도 한다. 게다가 남자와 여자가 쓰는 말의 어휘 의미 차이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화성남, 금성녀>이야기나, 롤러코스터의 <여자가 화났다>코너가 인기 있는 것도 그런 탓일 것이다.

     

      서로가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과 각 집단마다 사용하는 전문적인 어휘가 있다는 것은 오해의 시작이며, 세계를 나누는 시점(始点)이 된다.


    전문가들끼리는 전문 술어를 사용하면 편하다. 개념에 대한 암묵적 동의가 있거나 협약이 되어 있는 말 한마디로 수많은 설명을 생략할 수 있기 때문이다. –p.9

      책을 읽거나 TV토론을 볼 때, 강의를 들을 때 굳이 전문적인 학술어를 쓰지 않아도 될 곳에 굳이 쓰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난다. 일반 교양을 위한 책이나 강의, TV토론은 분명 불특정 다수의 비전문가들을 위한 이야기 장소다. 그러나 몇몇 지식인이라 자부하는 사람들의 언동을 보자면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갈 때가 많다.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암묵적 동의가 있거나 협약이 되어 있는 말’을 익힌다는 것과 크게 차이가 없다.

     

      김용석 선생은 열림의 가치를 설명하며, 개인의 독립성과 정체성을 그대로 두고, 다른 사람들과 자유롭게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미운 오리새끼>를 분석하며 제시하는 사회의 분석은 정말 날카롭다. 안데르센이 대단한 건지, 분석한 이 아저씨가 대단한 건지.


    문이 있다는 것은 일정한 공간과 함께, 그와 다른 외부 공간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며, 동시에 두 공간 사이의 차단과 소통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는 존재의 독립성ㆍ정체성과 함께, 그것이 타존재와 유지하는 관계와 연대(連帶)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p.71

    오리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들과 모습이 다른 아기 백조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오리의 이웃들도 다른 것이 섞인 부조화를 그냥 보고 넘기지 못한다. 곧바로 뒤따르는 것은 무시와 폭력이다. 다르다는 것이 폭력을 정당화한다. 또한 다르다는 것은 미적(美的)으로 낮은 가치와 동일시된다.

    ……어느 날 성숙한 백조가 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을 때에 그를 받아준 곳도 사실은 백조들의 닫힌 사회였다. 백조로서 그의 정체성(identity)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조건으로, 백조들 사이에서는 즉각적으로 동일화(identification)될 수 있었다. –p.79


    의사소통의 목적은 자유와 연대를 위해서다. 자신의 자유를 주장하기 위해서 얘기하고, 서로 협력하기 위해서 소통이 필요하다. 거기에 더해져야 할 게 있다고 이 책에서 선생은 말한다.


    “남이 너희에게 해주길 바라는 대로 남을 대하라”는 고전적 황금률에, “남이 너에게 해주길 바라는 대로라도 함부로 남에게 행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들의 욕구와 취향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입장이 첨가되어야 할 필요까지 생겼다. –p.270

     

    4. 문  화

     

      문화를 화두로 시작할 때면, 늘 하는 얘기가 있다. ‘문화의 어원은 무엇인가’ 이제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화의 어원 라틴어 ‘cultura’(경작하다, 밭을 갈다)에서 나온 말임을 안다. 농경사회로 진입하면서부터 문화가 생겨났을 것이며, 문화는 공간적인 범위를 갖는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문화는 한 사회의 구성원과 함께 발전하면서 조금씩 성격이 달라졌을 터이다.

     

      사회의 성격에 따라서 조금씩 문화의 성격도 달라졌다. 이 철학자 아저씨의 말대로 “이제 문화가 권력의 함의적 형용사의 자리를 차지하려 하고 있다.” 예전에 문화는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커다란 톱니바퀴의 몫은 아니었다. 그저 육체적, 정신적 노동에 지친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하거나 일부 상류계층이 사용한 부의 축적 수단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현대 문화가 ‘경제와 정략(政略) 결혼’을 했기 때문”에 문화는 자본주의의 거대한 동력 축이 되어버렸다.

     

      문화, 고급이든 저급이든 간에 이제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큰 톱니바퀴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의 소비가 어떻게 될까. 책에서는 흥미로운 개념을 들어 설명한다. 소비는 생산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며, 사람들은 문화의 소비를 강요 당하고 있고 쉴 때조차 무엇인가를 하면서 인간의 감각을 자극하고 있다는 설명을 적고 있다.


    ‘유도(誘導)된 필요성’이 개인과 집단의 구체적 욕구와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이것은 경제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문화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물질의 생산에서부터 의미(意味)와 상징(象徵)의 생산에 이르기까지 현대인이 복합적 ‘생산의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며, 이른바 문화의 세기라고 불리는 21세기에는 인간의 창조력이 중요시되면서 이 무제가 더욱 부각될 것이기 때문이다. –p.92


    인류 역사에서 산업사회까지는 사람들이 ‘노동’이라는 활동에 전력했기 때문에, 인간은 지속적 활동을 하는 동물이라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은 사람들이 쉴 때에도 무엇인가 ‘하면서’ 쉬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p.322


    활동의 극대화 과정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것은 인간 자신의 탈진(脫盡)을 향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인류 역사의 주요 이슈가 ‘자연의 소진’에서 ‘인간의 탈진’으로 이동할지도 모른다. –p.307


      세계적으로 문화는 조금씩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 인터넷과 유비쿼터스 기술 덕분인지 전세계 젊은이들은 같은 문화적 경험을 쌓아가고 있다. You Tube, 위키피디아, 트위터, Skype, 미니홈피, 블로그와 같은 양방향 인터넷 서비스가 그렇다. 물론 전 세계 젊은이들이―경제적인 관점에서 생기는 불평등의 문제는 부의 재분배 차원에서 의논이 필요하지 않을까―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서비스다. 거리와 공간이 멀어서 소통에 시간이 걸리는 경우는 사라지게 되었다.

     

      어쩌면 이제 전 세계적인 질서를 꿈꾸고 스케치를 그려봐야 할 때가 다가올지도 모른다. 인간의 삶과 문화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고, IT와 인터넷 기술 덕분에 인간의 삶은 지역(local)을 초월하여 전지구적으로 확대되었다. 삶과 문화, 그리고 공유하는 세계는 조화와 질서―Cosmos―를 향해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세계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World’나 독일어의 ‘Welt’ 및 한자 ‘世’는 ‘사람이 살아서 활동하는 시간 또는 시기’라는 뜻을 품고 있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 속에서, 세계라는 말은 ‘인간의 삶’이자 ‘인간의 생명’과 같은 불어ㆍ이탈리아어ㆍ서반아어에서 ‘세계’라는 말은 ‘조화’와 ‘질서’의 뜻을 지니고 있다. –p.188


    5. 인  간

     

      너무 당연한 얘기여서 그랬을까. 눈이 한 문장을 훑고 지나갔을 때, 분명 감흥이 일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뒤에 다시 한 번 그 문장에 눈길이 끌려갔다.


    인간은 계기를 필요로 하는 동물이다. 그리고 그 계기마다 시간적·공간적 변화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p.380

      인간은 계기를 통해 배운다. 꼬마 시절, 즐겨봤던 <드래곤볼>이란 만화에서 주인공 손오공의 성장을 보며 느끼던 쾌감이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손오공은 매번 강력한 적을 마주하고 싸우며 ‘거의’ 죽기 직전의 상태까지 갔다가 체력을 회복하자마자 엄청나게 강해진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 단련시킬 뿐이다.”라는 말이 여러 번 생각났다.

     

      사회에는 2:8의 법칙이 엄연히 존재하는 듯하다. 20%의 열심인 소수와 80%의 보통의 다수. 경제 성장원은 기술의 발전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다. 노동력에서 대량 생산으로, 다시 정교한 기술력으로,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기술을 생각해 낼 수 있는 창의력, 창조력을 강조하고 있다. 경제 성장의 동력, 사회를 이끌어 가는 구성원이 점차 줄어가고 있는 듯하다.

     

      농업사회에서는 대다수의 사람이 경제구조에 소속되어 생산자로 참여한다. 산업사회에서는 노동자나 관리자가 되어 생산자로 참여하고, 일부 구성원은 ‘노동 가능성이 있는 실업자’가 된다. 그러나 최근에 강조하고 있는 지식정보화 사회에서 생산자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소수다. 창의력이 있는 소수와 평범한 다수의 구조로 재편되는 것 같다. 김용석 선생의 지적대로, 모두가 창조, 창의력을 말하지만 정작 그것이 가능한 사람은 일부 소수가 되지 않을까 싶다.


    21세기가 창조력의 시대라 하지만, 그것은 점점 더 소수 개인의 창조력을 의미하지 다수의 창조력 향상과는 거리가 멀어질 가능성이 많다. –p.150

      인간은 늘 희망을 꿈꾼다. 프로메테우스가 가져다 준 불을 이용할 줄 아는 지혜와 생각할 줄 아는 존재다. 동물과 같은 직감은 떨어지지만 위기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능력을 갖췄기에 희망을 꿈꿀 수 있다. 모든 인간이 인간적일 수는 없지만, 인간적이기 위해 노력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세상은 어디론가 흘러가고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의 의미에 대한 해답은 열려 있다. 그러나 그것을 찾아보고자 하는 노력을 오늘날 기술 왕국의 내재적 원칙이 금지하고 있다. 그 원칙은 ‘그러한 의미를 묻고 찾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일축(一蹴)해버린다. 의미에 대한 물음조차도 무의미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p.281

     

    6. 마무리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갈 때 빛이 나는 존재다. 인간, 인류는 지금까지 지구 위 작은 땅뙈기에 정착하고 문화를 경작해왔다. 동양에서 만들었든, 서양에서 만들었든 지구촌에서 우리가 만들어낸 지구의 문화다. 지금 까지 인간은 어려움을 마주할 때마다 여태까지 만들고 쌓아 온 문화의 힘으로 극복해 냈다.

     

      이 책은 2000년에 초판, 10년이 지난 2010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10년 전에 예측했던 김용석 선생의 생각이 거의 현실과 맞아가는 듯하다. 인간은 문제를 해결하며 성장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누군가 말했듯이 사람들은 이렇듯 무의미 속에서도 의미를 찾으며(p.285)” 고민한다.

     

      끝 없는 시간 위를 개인마다 주어진 만큼 조금씩 걸어가며, 길가에 피어있는 민들레로부터 반짝이는 깨달음을 얻고 일상을 새롭게 바라볼 때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나지 않을까. 새로운 시각으로 주변에서 같이 걸어가는 사람들과 열린 마음으로 소통할 때, 조화로운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된다면, 각 개인의 삶이 아름답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재미를 넘어 의미로, 의미를 넘어 감동으로 가는" 삶이면 좋은 것이다. 삶은 몸과 머리와 가슴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삶이 아름답다’ 할 수 있다. –p.286

      뜨거운 커피 여러 잔을 마셔야 겨우 정신을 놓지 않고 집중해서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그리 두껍지는 않지만, 주석의 무게와 개념으로 주고 받는 공놀이는 결코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넘김과 동시에 마음 속에 굵은 앙금이 하나 생기고 있는 걸 느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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