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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책무 | 노암 촘스키비문학 2012. 12. 24. 17:51
하하하! 이 책을 옮긴 강주헌 선생의 글이 날 웃게 만들었다.
"'촘스키의 글이 이제는 식상할 때도 됐는데…'라는 생각으로 이 책을 번역하기 시작했다"는 첫문장. 맞는 말이다. 촘선생의 책을 지난 달에 7권이나 내질렀다. 물론 한 권은 언어학 관련 서적이지만, 막 두 권째를 펴서 30쪽 가까이 읽으며 들었던 생각은... A4 5장이면 요약 가능한 책이군! 이었다. 하지만, 지금 책장을 덮고 느끼는 건 그 이상이다. 역시나 사람은 오만하면 중요한 것을 놓치기 마련인가 보다.
이 책은 촘선생과 강주헌 선생이 밝히고 있듯이, 글로 먹고사는 사람들을 상대로 '글 쓰는 사람과 지적인 책임'이라는 강연을 하고, 그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모르겠다. 처음엔 굉장히 거창한 제목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우물쭈물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두껍지도 않은 책이었기에 쉽게 샀던 책이기도 했지만, 제목에 압도된 뒤로는 시험공부가 도피처였다.
언젠가 교육철학 에세이를 쓰면서 개진해 나갔던 논리와 비슷할까-싶은 생각으로 읽어 나갔다. 글쓰는 사람들. 문자, 그리고 문서는 그 힘이 대단하다. 특히 법치국가에서 성문법의 힘은 말로 더 해서 뭐하랴. 사람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는 절대반지가 바로 그것인데. 어쨌든 그 어마어마한 힘을 어떻게 써야할지. 그리고 글장이들에게는 어떤 책무가 따르게 되는 것인지 촘선생은 얘기한다.
1장 지식인의 책무를 펴서 첫14페이지를 넘기고, 15페이지에 눈이 이르면, 이 책의 에센스를 만나게 된다. 촘선생의 책들은 대부분 그런 것 같다. 정의와 선언에서 출발하는 그는 어쩔 수 없는 합리적 이성주의자일까?
['지식인의 책무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지식인의 책무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다.] 고 말하는 촘선생. 그 정도는 누구나 다 안다. 흥, 쳇. 하고 책을 덮을까? 하는 고민을 하며 읽어 내려간 그 문단의 다음 문장.
['지식인의 책무'를 좁은 의미로 해석하려 한다. 미학적 차원 등 많은 부분은 논외로 한다.] 뭐랄까. 과학자 다운 깔끔함이랄까, 책임 한정이랄까. 어쨌든 내 흥미를 끌기에 적절했다.
이 책의 대부분은 촘선생의 생각을 전달하고, 그 생각에 대한 논거와 자료들을 나열하면서 제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있다. 현실에서 나타나고 있는 '거짓과 위선'에 대해 송곳으로 가차없이 찌르고, 눈과 코 앞에 들이댄다. 보고, 맛보고, 느끼고 그대로 전하라고. 요즘의 지배 사상이 '돈을 벌어라! 너만을 생각하라!'라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 '인도주의'니 '복지국가'니 하는 선전의 거품을 걷어 버리고 진실을 '까발리라'는 것.
한미FTA가 얼마나 불평등한 것인지. 그리고 미국 지도계급이 어떤 방식으로 뇌를 굴리는지. 촘선생이 찔러댄 구멍에서는 피가 낭자하지만, 대중들은 TV앞에서, 쇼핑센터 안에서 시간과 돈을 버리고 있다. '정정당당한 자유시장'은 그들의 의미로 쓰고 있음을 고발하는 촘선생. 어찌나 절실히 다가오는지. 미국이나 영국 역시 일단 자국 산업을 '공정한 자유시장'에 내놓아도 경쟁력이 있을만큼 보호무역을 했다. 이젠 됐다 이거지. 세계를 대상으로 이젠 '공정한 게임'을 하자고 이리저리 치댄다.
촘선생은 무기를 팔아먹는 것도 웃기는 장사라며 일침을 놓는다. 만들어 둔 F16을 여러 국가에 대출을 주면서까지 팔고, 그 이득으로 F16을 업그레이드 해서 팔아먹은 국가들로부터 방위체제를 갖춘다. 대출에 대한 이자는 국민들의 세금으로 충당한다. 또 만들어서 남은 재고를 팔고, 다시 업그레이드 하고... 순환! 그렇게 미국의 항공우주산업은 발전하고, 돈도 그쪽으로 흘러가고.
책은 짧다. 읽기 쉽지 않다. 이미 10년도 더 된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접하고 있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임금 노동자는 임금 노예와 다를 바 없는 현실이고, "엘리트 계급이 복지국가를 위축시키고 폐지하려는 공동의 목표로 결속되어 있고", 워렌 버핏 같은 인간들은 정말 소수다. 나도 걱정된다. 촘선생이 책의 마지막페이지에 써 둔 문장. "내가 지금까지 변죽만 울린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촘선생이 변죽만 울리고 말게 되어버린 세상인지, 우리가 바꾸어 나갈 수 있을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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