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의 탄생 | 노마 히데키비문학 2012. 10. 17. 13:26
'한글'이라는 문자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그 발전 과정은 어떻게 되는지 다각도로 접근해서 풀어주는 대작이다. 보통 '한글'은 우리 사회에서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 같다. 한글을 창조한 우리 민족의 우수성, 세종대왕 개인의 뛰어난 업적을 찬양하고 꾸미기 위한 수단이었다. 목소리를 드높여 한글의 우수성을 찬양하는 사람들에게 '왜 한글이 우수하고, 과학적인 문자인가요?'라고 물어보면 대다수는 입을 닫고, 얼굴이 벌겋게 변한다.
미술가이자 한국어 학자인 노마 히데키(野間 秀樹)는 이 책에서 '한글의 탄생'을 큰 줄기로 삼아, 아주 빽빽한 언어-문자-지식의 숲을 이뤄냈다. 단순히 '한글'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국어국문학과의 언어학-문자론 수업의 한 학기 강의의 무게감이 담겨 있다.
한글의 구조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음이 문자가 되는> 놀라운 시스템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한글을 보는 일은 하나의 문자체계를 뛰어넘어 언어와 음과 문자를 둘러싼 보편적인 모습까지도 보는 일이 된다.
<언어>란? <음>이란? <문자>란 무엇인가?―이렇게 넓은 언어학적 시야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지知>의 모습 속에서 한글이라는 문자를 그려 내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책의 시좌(視座)이다. -p.12, 책머리에
책을 읽으면서, 드라마 한 편이 자꾸 떠올랐다. 한석규, 장혁, 신세경 주연의 <뿌리깊은 나무>. 한글 창제의 과정을 추리 소설 기법으로 풀어냈던 드라마다. 이 책에서는 좀 더 진지하게 한글 창제 과정을 파고든다. 드라마에서 보여준 정치 세력 간의 다툼이 아니라, 당시 중세시대의 지적 기반에 대한 논쟁을 중심으로, 세종과 그 라인의 젊은 학자들과 기존 엘리트 지식인들의 싸움을 그려낸다. 이 부분이 이 책의 가장 극적인 부분이자, 흥미로운 부분이 아닐까 싶다. (4장)
저자는 단순히 문자 '한글'의 탄생 과정에만 주목한 게 아니다. 한글의 구조에서부터, 언어인 한국어와 문자인 한글의 구분, 기존에 사용하던 문자인 한자(漢字) 시스템,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 훈민정음으로 쓰인 지적 생산물, 한글의 형태와 서체, 근대에 겪었던 한국어와 한글의 수난까지. '과학적인 문자로서의 한글'을 알기 위한 여러 분야의 지식들을 종횡으로 그물망처럼 꼼꼼하게 엮어내고 있다. 탄성이 절로 난다.
저자의 모어(母語)인 일본어와 한국어에 대한 비교는 물론이고,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중국어, 몽골어 등에 대한 지식까지 절묘하게 버무려 넣는다. 세계의 문자와 한글에 대한 비교-설명에까지 이르게 되면, 책을 덮고 다시 한번 저자의 이름을 확인하고 싶어진다.
세계의 문자사는 표어문자로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음절문자와 단음문자가 탄생했다. 같은 단음문자라 해도 <정음>의 표기 방식을 보면 음운론의 평면, 음정구조론의 평면, 형태음운론의 평면이라는 각각의 단계에서 자유로운 표기가 원리적으로 가능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형태음운론적인 표기란 요컨대 <표어表語>로 가는 길이기도 한 것이다. -p.221
저자는 미술가 경력을 숨기지 못했다. 시중에는 '한글'에 대한 좋은 책이 많이 나와있다. 다만, 그 책들은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싶은 분들이 학술적으로 쓴 것들이 많다. 내용은 물론 충실하지만, 정말로 학술적인 내용과 언어-문자에 대한 지식에 한정된 책이어서 미적(美的) 감흥을 일으키지는 못한다.
그런데 노마 히데키, 이 선생은 다르다. 시각적인 장치를 통해 어려운 내용을 쉽게 이해시키는 능력도 탁월하고, 훈민정음의 필체와 그 이유, 형태의 아름다움조차 설명에서 빼먹지 않는다. 꼼꼼하다.
끝으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이 책에서 마지막까지 견지하고 있는 태도가 인상 깊었다. 글을 읽는 내내 저자가 한글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잔뜩 품고 있을 것이란 추측을 하게 했지만, 그런 감정적인 문장은 찾을 수 없었다. 오로지 지知만 좇았던 소크라테스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따름이었다. 그의 이런 치우치지 않는 태도가 일본에서 이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나라에서도 '우리말-한글 운동'과는 다른, '우리말-한글 교양'이 살아나야 할 느낌이 든다.
<책에서>
<한글>은 언어의 명칭이 아니라 문자체계의 명칭이다. ……일본에서는 이 <한글>이라는 명칭을 종종 언어명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한글 강좌'라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한국어 강좌'를 가리키는 식이다. 이는 '일본어 강좌'를 '히라가나 강좌'나 '가타카나 강좌'로 부르는 것과 같다. -p.32
<정음>은 <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것을, 그 발생론적인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형태>를 찾고, 보이는 형태로 <상형>한 것이다. ……창제자들은 <정음>의 근원, <음>이 <형태>를 얻는 근원을 그렇게 규정하고 그렇게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p.158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