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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 |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그라닌비문학 2012. 10. 24. 09:55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
- 저자
-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그라닌 지음
- 출판사
- 황소자리 | 2004-01-30 출간
- 카테고리
- 과학
- 책소개
- 매일 8시간 이상을 자고 운동과 산책을 한가로이 즐겼으며 한 해...
인상깊은 구절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시간을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매 시간이 자기 삶의 일부분이고 따라서 모든 시간이 다 똑같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p.76
미하엘 엔데의 모모를 읽으면서 이런저런 궁리를 했다. '누군가가 내 시간을 훔쳐다가 쓰고 있는 게 아닐까, 다른 사람들과 얘기하며 보내는 시간이 진정 내게 필요한 시간일까. 잃어버린 시간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왜 시간은 아끼면 아낄수록 부족하게 느껴지는 걸까. 모두가 정말로 같은 하루를, 24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걸까?' 밑도 끝도 없는 생각들이 몰아쳤다. 정말 답도 없었다.
그렇게 시간에 대한 질문은 숙제로 남겨두고 본능적인 흥미가 이끄는 대로, 상황이 이끄는 대로 시간을 채워왔다. 여러 주제에 발만 담갔다가 빼며 책들을 뒤적이다가, 기억력과 창의적 사고에 대해 관심이 갔다. 그때부터 '기적의 기억법', '생각의 탄생',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생각하기' 따위의 책들을 사들였다. 그러다가 접한 책이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였다. '기억술사'라는 직업을 가진 러시아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책에서 이 아저씨 이름을 알게 됐다. '류비셰프'. 일단 이름이 발음하기 어려웠다. 그래서인지 기억에 남았던가 보다.
이 책은 러시아의 전기 작가가 '류비셰프'라는 한 곤충학자에 대해 기술한 '다큐멘터리'였다. (거칠게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정도 되겠지만, 자세히 설명을 하더라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듯하다.)
류비셰프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디드로, 정약용, 다치바나 다카시와 같은 부류의 인간이었다. '전문가'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전혀 이해불가능한 부류의 인간. 자신의 전공분야 뿐만아니라, 철학, 과학, 문학, 공학, 사학 등의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분야의 지식에 해박했던 인간. 다치바나 다카시의 말대로 제네럴 리스트(Generalist)의 인간형이었다.
류비셰프가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감히 그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 얘기 도중 영국 군주에 대한 말이 나오면 그는 곧 영국 국왕들의 통치 철학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고, 종교로 주제가 바뀌더라도 코란, 탈무드, 로마 교황제도의 역사, 루터나 피타고라스의 사상 등 모르는 것 없이 다 꿰뚫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수학, 농업경제학, 피셔의 사회적 다위니즘,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사 등등 거의 모든 학문을 두루 섭렵하고 있었다. -p.35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식을 쌓고, 논의하면서 자신의 일을 이루어낼 수 있었을까. 이들의 시간은 나와 같은 24시간이 아니었을까―하는 따위의 고민을 하던 차, 류비셰프의 시간 관리법에 대해 얘기가 진행됐다. (정말 독특한 사람이다. 나도 이 방법을 한 번 써볼까 고민하다가, 철두철미하지 못한 내 성격과 인생의 꽤 많은 시간을 이 방법만을 위해 소비해야 한다는 사실에 포기했다.)
류비셰프가 스스로 개발해서 사용한 시간 통계법은 정말 독특하다.
1964년 4월 7일, 울리야노프스크.
· 곤충분류학 : 알 수 없는 곤충 그림을 두 점 그림. 3시간 15분.
· 어떤 곤충인지 조사함 - 20분 (1.0).
· 추가 업무 : 슬라바에게 편지 - 2시간 45분 (0.5).
· 사교 업무 : 식물보호단체 회의 - 2시간 25분.
· 휴식 : 이고르에게 편지 -10분.
· 울리야노프스카야 프라우다 誌 - 10분.
· 톨스토이의 《세바스토폴 이야기》- 1시간 25분.
기본 업무 - 6시간 20분. (p.42)
이게 그의 일기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평소에 적은 일기의 내용이 이렇다. 조금 더 충격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 부분이 있었다.
1941년 6월 22일, 키예프.
독일과의 전쟁 첫날. 13시경에 소식을 들음…….
1941년 6월 23일.
거의 온종일 공습경보. 생화학연구소 회의. 야간 당직. (p.43)
세계 1차 대전 중에도 이런 일기다. 아들 둘이 전사했을 때도 어떤 감정의 표출도 없이 이렇게 사실 나열에 가까운 일기를 적었다. 인간미 없는 사람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뒤에 이어지는 그의 삶과 그를 아는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면서 차차 알게 된다. 자신의 삶에 정말 충실했던 사람이자, 한 순간도 헛되게 보내지 않았던 사람이란 걸 깨닫게 된다.
버나드 쇼가 스스로 적은 묘비명이 순간 떠오른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지."
류비셰프는 우물쭈물 하지 않으려 노력한 사람이었다. 누구에게 주어지는 하루, 그 시간을 소중하고 알차게 쓰려했던 한 사람에 대한 기록이 담긴 책이었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는 내용처럼, 이 책은 재미있게 읽기는 어려울 수 있다. 그렇다고 류비셰프가 사용한 시간 통계법을 독자의 일상 생활에 응용해서 적용하는 것도 쉽지 않다. (개인 윤리적인 문제와 신념, 개별적 상황에 의한 문제가 뒤따를 듯.) 그렇지만 이 책은 한 번쯤 읽어도 좋을 듯하다. 현대에 존재했던 이상에 가까운 교양인의 삶을 추적하고, 어떻게 자신의 삶을 알차게 채웠는지 느껴볼 수 있는 책이다.
다만, 작가의 긴 사설이 때론 지겹고, 다큐멘터리 풍의 자문자답이 식상할 수도 있으나, 가볍게 읽어 넘긴다면 크게 걸림돌은 되지 않을 듯.
<책에서>
이제야 마침내 우리는 자신이 왜, 무엇을 위해 사는지 아는 사람을 만나 것 같다. 그는 숭고한 목적을 가졌던 듯, 더 나아가 자기 존재의 의미를 온전히 깨달았던 듯하다. -p.30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2000년 전 세네카 시대나 지금이나 똑같다. 세네카는 "우리는 삶의 대부분을 실수와 어리석인 행동으로 허비해버리고, 수많은 시간을 아무 일도 하지않은 채 그냥 흘려버린다. 그리고 우리는 거의 평생동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만 하고 산다"라고 말했다. -p.51
먼저 아침에는 머리가 맑기 때문에 철학이나 수학 분야처럼 고도로 집중해야 하는 책들을 읽는다. 약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정도 읽고 나면 조금 읽기 쉬운 역사나 생물학 방면의 책을 읽는다. 그리고 머리가 피곤해지면 가벼운 소설류를 본다. -p.69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인들 혹은 프랑스의 백과전서파 … 당시 학자는 곧 사상가였다. 학자는 자기 학문과 전체 문화 사이의 조화를 찾아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과학과 철학이 함께 진보하였다. 오늘날 이런 협력 관계는 파괴되었다. -p.112
'어떠한 권위에도 기울지 않고 제아무리 인정받는 원칙이라도 신념으로 삼지 않는 사람' -p.115, 투르게네프의 창조적 허무주의자 개념
류비셰프의 몇 가지 생활 원칙 -p.165
1. 의무적인 일은 맡지 않는다.
2. 시간에 쫓기는 일은 맡지 않는다.
3. 피로를 느끼면 바로 일을 중단하고 휴식한다.
4. 열 시간 정도 충분히 잠을 잔다.
5. 힘든 일과 즐거운 일을 적당히 섞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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