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큼했다. 서걱서걱 씹히는 오이와, 익히지 않은 날치알. 김밥의 로망, 단무지도 역할을 다 했다. 저녁은 날치알을 넣은 오이김밥이었고, 녹차와 함께했다. 이제 살 수 있을 것 같다. 슬쩍 쳐다 본 온도계의 수온주는 오늘도 31. 며칠 째 움직이지 않는다.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머리카락 속의 땀은 나를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냉동실에 비축해 두었던 전투식량─사탕바, 상어바, 이맘때, 빅빅빅─도 오늘 늦은 7시를 기해 동났다. 조조가 그랬다. 행군 중에 목마른 군사들을 독려하며, 이 산만 넘으면 저 앞에 모두가 먹고 죽어도 남을만큼의 시고 달달한 매실나무가 그득하다고. 나는 나에게 이 책략을 걸어보았지만, 아무래도 조조가 되기엔 글렀나보다.
더운 날에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흐르는 땀이 마음 속에 있는 열기를 식혀 버리는 것은 아닐까─하는 음모론을 떠올리면서, 오랜만에 볼펜을 들었다. 예전 생각이 떠오른다. 초등학생일 때는 동네 형들이 부러웠다. 모나미153 볼펜으로 공책에 스스슥 멋진 필체로 적어 가는 것을 보면서, '왜 선생님하고, 어른들은 볼펜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라고 고민했다. 둘리가 그려져 있었던 HB연필을 정리하고, 중학생이 되던 날, 볼펜을 샀다. 모나미153의 로망과, 여태 즐기고 있는 빅볼. 이 두 녀석들의 매력은 나에겐 각별했다.
중, 고등학교를 다니며 수많은 종류의 펜을 볼 수 있었다. 중학시절 정말 친하게 지냈던 여학생의 필통은 그 무게만도 한 근은 되어 보였고, 단 한 자루면 153과 빅볼 열다섯 자루를 살 수 있었던 펜도 있었다. 그 볼펜은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 받으며 쓰이고 있는 듯 하다. 요즘도 문구점에서 많은 중, 고등학생들이 '기장의 높은 기술'로 만든 펜을 고르는 모습을 종종 본다. 한때는 나도 모나미153과 빅볼을 배신한 적이 있다. 그들의 멈추지 않는 설사에 늘 휴대해야 했던 휴지. 그들이 흘려 놓고 다니는 똥을 제때에 처리하지 못하면, 여지없이 공책의 앞은 물론이고, 뒷면까지 영역표시를 하곤 했다.
어느 날, 나도 '기장의 높은 기술'펜을 샀다. 그 펜은 너무나 섬세했을까. 이틀만에 실수로 책상에서 떨어져 자유낙하했던 그 볼펜은, 볼이 빠졌다. 그 아까움이 아직도 뼈에 새겨져 있는 것인지. 그 이후로 그 펜을 산 적이 없다. 자라보고 놀란다던 옛말. 옛말 틀린 것 하나 없다. 그 펜 비슷하게 생긴 펜들도 나의 기피대상이 되었고, 그 이후로 친구들이 "펜 좀 사라, 쫌!"이라고 날 바라보며 말할 만큼, 모나미153과 빅볼에 전념했다. 얇은 글씨가 필요할 때는 모나미153이 그 역할을 맡았고, 편안한 필기를 할 때는 빅볼이 나와 함께 했다. 좀 많이 흘린다는 것만 제외하면 성실한 친구들이다.
습관이랄까, 나는 이때 희열을 느낀다. 153의 머리를 돌려빼서 남은 잉크량이 얼마나 되었는가 확인해 보고, 한 시간 수업이 지나고 나면 잉크를 얼마만큼이나 썼는지 확인한다. 하루에 쭉쭉 내려만 가는 잉크 기둥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뿌듯해 지고는 했다. 마치 그 잉크들이 죄다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착각, 그리고 참을 수 없는 기쁨이 나를 휘감았다. 그렇게 모두 쓴 볼펜은 모았다. 모나미는 친절하다. '내 친구MonAmi'라 그럴까. 샤프심처럼 리필 가능이라 좋았다. 예전에는 잉크심 하나에 삼십 원이었다. 요즘엔 얼마인지 잘 모르겠다. 지금도 이 글을 쓰고 있는 키보드와 컴퓨터 덕에, 매일 느꼈던 희열을 맛보지 못했다.
온도계를 다시 본다. 31. 허허. 한결 같음에 웃음만 나고, 하루 종일 돌아갔던 선풍기에서는 이제 뜨거운 바람이 나오기 시작한다. 요즘에 나오는 선풍기 모터는 작다. 나보다 나이가 많았던 한일 선풍기는 아직도 할머니 댁에서 돌고 있겠지. 그 녀석은 에너자이저를 잡아 먹었던가, 모터가 내 머리만 했다. 하루종일 돌아도 시원한 바람이었는데. 온도계와 볼펜, 중학시절의 그녀, 할머니, 선풍기. 그 모든 것이 한 순간에 피어난다. 집어 먹은 날치알 만큼 많은 추억들이 부화하기 시작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