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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삑삑거리는 개찰구, 외로운 관중
    無序錄 2011. 12. 28. 19:51

      오후 7시 3분. 투캉─투캉투캉─이 소리가 그치면, 잠시 후 사람들이 몰려 나왔다. 건대입구역은 퇴근 시간 내내 씨끄러웠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삑'하는 소리만이 새벽에 참새 지저귀듯 연방 '삑삑'거렸다. 사람들은 자동매표기 앞에 서있는 나를, 1초도 보지 않고 스치듯 사라져간다. <매트릭스>의 요원들처럼, '넌 그정도면 됐어'라는 눈빛으로 째리고 사라져간다. 그렇게 하나 둘 세던 머리 속의 손가락은 서른여덟을 넘기면서 잊혀졌다. '무슨 상관이람.'
     
      나는 헐렁한 차림으로 자동매표기 앞에 서있었다. 삼 년 전에 생일 선물로 받은 하얀 드레스 셔츠를 입고, 카키색 면바지 차림으로 개찰구를 봤다. 아까부터 같은 패턴으로 사람들은 움직였다. 외선순환 열차가 들어오면 '투캉투캉' 소리는 멀리서 들려온다. 역사의 울림이 내 머리 위에서 멈추고 5초만 지나면 '요원들의 물결'은 시작된다. 내선순환 열차는 내 위에서부터 소리가 커진다. 역시 5초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들의 흐름은 '운'이 좌우한다.
     
      외선과 내선은 나름대로 운행된다. 2호선의 숙명은 도심 순환노선이란 것에서 출발할 거라. 일정한 시간을 두고 움직이는 지하철이지만, 출퇴근 시간의 흐름은 약간의 지연이 함께한다. 따로 도착하는 외선과 내선의 그들은 운이 좋다. 그들이 왔음을 알리는 소리와, 그들이 레일에서 탈출하는 그 순간─삑!─의 간격이 짧다. 그들의 움직임은 한결 부드럽다. 껌을 씹으면서 건대입구의 술집들로 발을 향하는 남녀의 흐름은 경쾌하기까지 하다. 나는 갈색 뿔테를 치켜 올렸다.
     
      난 무심한척 그들을 흘기고, 손에 들고 있던 <부의 미래>를 다시 본다. 이런 구절이 눈에 띈다.
     
      '물론 19세기의 금융 혼란과 1930년대 대공황을 극복한 것처럼 자본주의는 그 어떤 어려움에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우리에게 "자본주의여, 영원할 지어다!"라고 말한다.'
     
      그럴 수도 있지않나, 방금 눈 앞을 스쳐갔던 남녀의 흐름은 분명 알콜 섭취를 통해 대한민국의 GDP를 올리러 간 것이 분명했고, 그들과 같은 흐름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강한 생명력'을 지녔을테다. 나는 신선같은 표정을 지어보며 웃었다. '내가 진짜 속물이지, 크흣.'
     
      이제, 일진 사나운 그들의 흐름이 시작됐다. 6분 전에 목격했던 장면이 다시 펼쳐진다. 외선이 도착하자마자, 내선이 도착했다. 두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큰 흐름이 쏟아지기 시작할 무렵. 내 시선이 곧장 닿는 곳에서 또 다른 흐름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거대한 세 줄기의 흐름은 맞부딪힌다. 외선에서 나와, 7호선으로 내달리던 머스타드 소스빛 티를 입은 반대머리 아저씨는 마지막까지 내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시선이 끝난 지점에서 다시 시작된 시선은 한 여학생을 좇기 시작한다. 적당하게 바랜 스키니 진과 하얗고 짧은 티셔츠로 멋낸 모습으로, 어깨까지 흐르는 머리칼을 날리며 외선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레일을 탈출하고자 했던 흐름들은 끝내 탈출에 성공한다. 무심하게 카드를 대는 사람들 속에, 청바지와 분홍티를 입은 남학생이 거침없이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를 좇던 시선은 형광 연두빛에 이끌렸다. 바지가 먼저 눈에 들었던 할머니는 알이 큰 금테 안경을 끼고 종종 걸어 나갔다.
     
      오랜만에 돌이킨 습관이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주로 난 혼자였다. 지금도 살고 있는 동네와 이곳의 학교가 싫었다. 중3때 선복수 지원으로 갈 수 있는 고등학교의 존재를 알고나서 뛸듯 기뻤다. 나는 더 잴 것도 없었다. 종로구에 위치한 학교에 원서를 넣었고, 합격했다. 그때 같이 지원해서 붙은 양군과 허사노바 녀석들과는 지금도 절친하게 지낸다.
     
      고등학교를 다니며 방황했다. 시인이 되겠노라며 오지도 않던 뮤즈를 불러댔고, 술을 빌어 번쩍이는 환각을 경험하기도 했다. 교복을 입은채로 한참을 걸어다니곤 했다. 날씨가 요즘처럼 미칠 것 같이 좋은 날이면 경복궁으로 향했고, 가슴이 갑자기 미어지면 사직공원으로 향했다. 안평대군이 살았다던 수성궁을 눈으로 찾아보며, 그 흔적없음에 흐르던 눈물이 기억났다. 그러다 외로워서 죽을 것 같은 날이면, 이어지는 그림자를 따라 마로니에까지 걸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그곳에 앉았으면, 나는 오롯이 혼자였고 웃는 얼굴과 바삐 걷는 그들은 죽어가는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랬다. 외로운 날이면 나는 사람을 구경했다. 비둘기들이 화장실로 착각했던 나무, 그 나무 둘레의 벤치에 앉아서 나는 그들의 얼굴을 구경했다. 여길보소 걷는 연인들과, 한 구석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사람과, 땀을 뻘뻘 흘리며 배드민턴을 치는 내 또래의 학생들은 구경하던 나를 방치했다. 그리곤 그들은 레일과 버스를 향해 발길을 옮겼고, '똑' 떨어진 비둘기 똥에 맞은 나의 외로움은 세상을 떠나곤 했다.

    '젠장. 또 비둘기 똥이 나를 살려?'
     
      출구를 나서는 흐름 속에서 단정한 세미 정장 차림의 요원이 뛰어온다. 세상 누가 봐도 밝은 표정으로 출구를 뛰쳐 나온다. 나는 멍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다─그 요원은 나에게 뛰어 안겼다. 꽤 길었던 가위눌림은 비둘기 똥이 아닌, 맑은 웃음을 가진 요원이 나를 흔들자 풀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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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oem_정원사_책들이 있는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