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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알랭 드 보통문학 2012. 2. 3. 08:57
-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 국내도서>소설
- 저자 :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 / 정영목역
- 출판 : 청미래 2007.08.01
“철커덕”
책을 읽다보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소리가 들린다. 작가가 늘어놓은 문장의 숲을 산책하다가 열쇠를 발견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눈길을 옮겨 갈 때마다 열쇠는 내 마음 속 자물쇠를 열고 만다. 자물쇠가 풀린 가슴에 ‘사랑’으로 담근 시간의 술을 부어버린다. “사랑의 생애”로 빚은 이야기를.
알랭 드 보통의 첫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다 읽고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일단, 기분이 나빴다. 이 사람이 이 책을 쓴 게 정확히 내 나이였다. 그는 25살에 사랑에 관한 ‘에세이×소설’을 써냈는데, 나는 무얼 하고 있는 거며, 뭘 이루어냈는가―하는 자괴감이 앙금을 하나 만들었다. 게다가 이 사람의 방대한 지식에 앙금은 점점 더 작은 수은 덩어리를 끌어들이며 몸집을 불렸다. 그뿐인가. 유머와 철학적 분석이 가득한 독자의 활주로는 빛나기까지 했다. 군입대를 앞둔 내 눈빛은 모든 활자들을 피했지만, 가기 전날 밤 꾸역꾸역 한 권 삼키고 들어간다.
1장부터 24장의 분량으로 사랑을 분석한 소설이다. 표지에 큰 글씨로 “소설”이라고 써놓지 않았다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사랑 철학” 교양서로 취급받았을 것 같다. 보통 아저씨는 사랑의 장면을 순전히 개인의 입장에서 그려낸다. 비행기 옆 좌석에 앉게 된 인연으로 맺어지는 두 사람의 연애 이야기가 1장에서 시작된다.
역시나, 보통 아저씨의 관찰력과 글 쓰는 버릇은 초기작품에서도 뚜렷하다. 아주 가볍고 일회적인 일상들을 하나도 허투루 스쳐 지나지 않는다. 서로 “우연히” 같은 비행기의, 나란히 이어진 창가의 좌석에 앉게 된 확률을 계산하면서부터 독자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킨다. “우리는 우연히 같은 시간에 파리로 가는 비행기에 탔다. 그리고 또 우연히 옆에 앉게 되었다.” 정도로 줄여버릴 수 있는 1장을, 확률 수식과 “브리티시 항공 보잉 767기”의 좌석도 그림까지 첨부하면서, ‘사랑에 있어서의 우연과 필연’을 차분하고도 유쾌하게 풀어나간다.
지금 사랑에 빠져있거나, 오랜 연인을 두고 있거나, 옛 연인을 기억하고 있다면 이 책은 당신을 단숨에 사로잡을 수도 있다. 보통 아저씨가 내 마음의 자물쇠를 “철커덕” 풀어버리고, “아, 그랬구나. or 그랬지.”라고 읊조리게 된 것과 같은 경험을 당신도 할 수도 있다.
사랑은 불가사의한 사건이다. 보통 아저씨의 24장에 걸친 “사랑의 생애” 분석도 결국 “완전무결한 분석”이 될 수 없다는 고백으로 끝내고 있다. 막 태어난 사랑에 이 세상 모든 것이 순정만화처럼 보이기도 하고, 병들고 죽는 사랑에 죽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성숙한 사랑은 서로를 또렷하게 비춰주는 거울이 된다. 정말로 어쩌면, 보통 아저씨가 한 이 말이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가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p.161”
아무래도 사람은 사랑을 해야 행복할 것 같다. 그 녀석이 죽든 살든 간에.
<책에서>
그녀(클로이)가 내 삶에서 하게 된 역할을 다른 사람도 똑같이 해낼 수 있다고 어떻게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사랑하는 것은 그녀의 눈이고, 그녀가 담배에 불을 붙이거나 키스를 하는 방식이고, 그녀가 전화를 받거나 머리를 빗는 모습인데. -p.17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약간 변형하자면] 희망이 자신에 대한 인식에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있다고 아는 것―비겁함, 심약함, 게으름, 부정직, 타협성, 끔찍한 어리석음 같은 것―을 상대에게서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랑에 빠진다. -p.22
사랑의 최초의 움직임은 필연적으로 무지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p.25
전화는 전화를 하지 않는 연인의 악마 같은 손에 들어가면 고문 도구가 된다. 이야기는 전화를 거는 사람의 손에 놓여 있다. 전화를 받아야 하는 사람은 그 이야기의 전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다. -p.30
나는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상상하고 그 눈을 통하여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그녀에게 누구인가?였다. 그 질문의 재귀적인 운동 속에서 나의 자아는 점점 배반과 비진정성에 물들게 될 수밖에 없었다. -p.44
자신이 다른 사람의 사장의 대상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만큼 기쁘면서도 무시무시한 일은 드물다. 스스로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고 확신하지 않을 경우에는 타인의 애정을 받을 때 무슨 일을 했는지도 모르면서 훈장을 받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p.72
사랑은 절대 주어지지 않는다. 사랑은 사회에 의해서 구축되고 규정된다. 적어도 한 사회, 뉴기니의 마누족에게는 사랑이라는 말도 없다. 다른 문화에는 사랑이 존재하지만, 특정한 형태로 주어진다. -p.127
순간 나는 클로이의 팔꿈치 근처에 있던, 무료로 나오는 작은 마시멜로 접시를 보았다. 의미론적 관점에서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갑자기 나는 클로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시멜로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p.133
나는 그녀의 이런 사소한 동작에서도 매력을 느꼈다. 모든 것을 그녀가 완벽하다는 증거로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거의 모든 것을 보았다.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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