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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 마르그리트 뒤라스문학 2012. 2. 3. 08:58
- 연인
- 국내도서>소설
- 저자 : 마르그리트 뒤라스 / 김인환역
- 출판 : 민음사 2007.04.30
생각났다. “대지극장 절찬리 상영중”
내가 살던 동네는 즐거웠다. 분명히 행정 구역 상으로 서울이 맞았지만 시골 냄새가 났다. 과수원이 있었고, 그 너머로 연탄 공장이 있었다. 태양도 뒤척이는 시간부터 연탄을 실어 나르는 기차가 집 근처를 지나갔다. 때때로 아버지는 불끈 화를 내며 옆으로 돌아눕곤 했다.
“툭―카앙―투카―앙, 투캉투캉……”
새벽 4시 즘이었다. “툭―카앙”하는 무거운 강철소리가 먼 데서 들려오면 내 하루는 시작했다. 과민한 아홉 살 어린이는 잠을 깨서 눈을 뜬다. 창호지로 바른 창문을 통해 노란 가로등 빛이 부서져 흘렀다. 아버지, 어머니, 동생, 나. 이 순서로 누워서 새벽의 기차소리를 받아들였다. 아버지는 뒤척였고, 어머니와 동생은 꿈나라를 헤맸다. 철로와 철 바퀴가 빚어내는 규칙적인 진동에 어린이는 이상한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종철이 형은 중학생이었다. 얼굴도 잘 떠오르지 않고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지만, 요즘도 주기적으로 그 이름이 떠오른다. <연인>을 케이블 방송으로 볼 때, 책 표지에 실린 ‘그녀’의 흑백 사진을 볼 때. 어김없이 그 형의 이름이 떠올랐다. 형은 영화 팸플릿 광이었다. 옛날에는 명함크기만한 영화 팸플릿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매번 어느 영화가 개봉되면 볼 수 있건 없건 간에, 팸플릿을 하나씩 꼭꼭 모아서 앨범처럼 만들어 보관해뒀다가 동네 아이들에게 구경시켰다. 아니, 구경보다는 자랑에 가까울 것이다. <빽 투 더 퓨처>, <터미네이터>, <인디아나 존스>, <로보캅>, <뽕>, <산딸기>……. 그때 본 <연인>의 팸플릿을 잊지 못한다. 푸르스름한 빛이 도는 여자의 표정.
연탄 공장의 덕분인지 동네에서 한참을 놀고 나면 검댕이가 묻어 나왔다. 코딱지는 대부분 다크 그레이였고, 목에는 선명한 나이테를 새겨놓고 다녔다. 동네 어린이들은 모두가 그랬다. 사람의 기억과 연상은 이상한 걸 넘는다. 기묘하다. 미아리 대지극장에서 상영하는 <연인>의 포스터, 그걸 처음 본 건 어느 집 앞의 철제 캐비닛 옆구리에서였다. 그래서인지 검댕이도 묻어있었고, 밑에는 쓰레기로 가득 찬 “봉다리” 천지였다. 한쪽 구석에는 하얗게 바란 연탄재들이 공간을 메우고 있었고.
친구를 만나러 가는 지하철에서 <연인>을 읽었다. 지금까지 주절거린 이미지가 무엇보다도 먼저 떠올랐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문장보다도, 손을 대면 톡 터져서 사라져버릴 것 같이 슬픈 이야기도 “다음 역”이었다. 이 작품의 구성도 내 기억과 비슷했다. 마르그리트의 어릴 적 기억이 뼈를 이루고 아쉬움과 추억들은 살을 이루고 있었다.
늙어버린 프랑스 노파의 이야기는 현실과 회상을 오가며 단편적인 이미지를 그려낸다. 그러나 그녀의 문장은 언제나 진행형이다. 하나하나 또렷하게 그려내는 촉감, 냄새, 빛, 소리들은 기억에 시간을 불어 넣는다. 과거와 현실과 미래는 단편적인 회상 속에서도 오로지 “현재”로만 재생된다. 뒤엉켜버린 필름들처럼 이야기는 흘러간다.
왜일까. 이렇게 짧은 성매매 연애 이야기를 읽고 기분이 가라앉는 건. 한 소녀의 삶의 무게에 내 마음이 짓눌려서일까, 불쌍답답한 중국 청년의 삶에 미지근한 분노가 일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연탄 검댕이와 쓰레기 봉다리가 <연인>과 한데 묶여 있는 기억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눈과 마음을 녹여버리는 문장들이 수두룩하다. 베껴 적기 욕구가 일었다.
<책에서>
욕망을 외부에서 끌어 오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욕망은 그것을 충동질한 여자의 몸 안에 있다. 그게 아니라면 욕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첫눈에 벌써 욕망이 솟아나든지 아니면 결코 욕망이란 존재하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성욕과 직결된 즉각적인 지성이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p.27-28
웃음소리도, 고함지르는 소리도. 다 끝났다. 더 이상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나는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힘들이지 않고 쓸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길게, 이렇게 장황하게. 그녀는 술술 풀리는 글이 되었다. -p.38
처음부터 우리는 두 사람이 공유하는 미래는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미래에 대해서는 결코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신문 기사 같은 것들에 대해서만 얘기를 나눌 것이다. 늘 같은 감정으로. -p.62
불멸성이 삶 속에 있을 때, 그것은 길게 사느냐 짧게 사느냐 하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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