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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서록 (보급판 문고본)
- 국내도서>시/에세이
- 저자 : 이태준
- 출판 : 범우사 2003.08.12
인상깊은 구절
인생의 외로움은 안해가 없는 데, 아기가 없는 데 그치는 것일까. 안해와 아기가 옆에 있되 멀리 친구를 생각하는 것도 인생의 외로움이요, 오래 그리던 친구를 만났으되 그 친구가 도리어 귀찮음도 인생의 외로움일 것이다. -p.42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시는 정지용, 소설은 이태준"
무슨 소리인가 했다. "시는 정지용"이란 부분까지는 '응, 그럴 수 있지'하고 생각했지만, "소설은 이태준"이란 부분에서 고개를 갸우뚱할 따름이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지만, 여태 상허 이태준의 소설은 접할 기회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소설가로서의 이름 역시 크게 들은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잊고 있었다. <문장강화>의 상허, 그 이태준이 이 사람인 것을 "거의" 눈치채지 못하고, 떠올리지 못했다. 불찰이었다.
지하철에 올라 손에 범우문고를 쥐고 펼치면, 늘 기대가 된다. 여태까지 범우사의 이 작은 책자를 읽고 실망한 적이 없다. 내 운이 좋았던 탓인지, 범우사 사장의 탁월한 책 선정 능력인지 모르겠지만. 이번 여름에 들었던 <무서록> 역시 일품이었다. 작년이었던가, 근원 김용준의 <근원수필>을 읽고 짧막한 서평을 남긴 일이 있다. 수필이라면 그저 피천득 선생의 <인연>만이 읽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던 내게 적지 않은 충격을 줬던 글이었다. <근원수필>이 김용준의 담박한 인격을 담아낸 글이었다면, <무서록>은 이태준의 강직한 성품과 함께 우리말의 리듬을 잘 살린 글인 듯하다. <문장강화>의 저자다운 글이다.
"無序錄"이란 제목으로 하나의 문학 장르를 정의내린 느낌이다. 자신이 겪고 느끼고 생각했던 것을 두서 없이 기록하면서, 스스로 깨닫기도 하고 반성하기도 하는 글이 바로 "수필"이 아닐까. "일기"와 차이가 있는 것 역시 그 부분일 것이다. 미셸 투르니에의 "일기 분류법"을 떠올려 "일기와 수필"을 구분하자면, 그날 있었던 사건에 대해 기록하고 반성하는 수단인 일기는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내면일기"의 성격이 짙다. 반면에, 자신의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두서 없이 기록하고 사유의 흐름을 적어가는 수필은 "외면일기"의 속성이 강하다.
이태준은 <문장강화>에서 이렇게 썼다.
글짓기가 아니라 말짓기라는 데 더욱 선명한 인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p.26
이와 같은 글쓰기에 대한 기준이 분명했던 사람이기에 <무서록>과 같은 수필을 30대의 젊은 나이에 풀어낼 수 있었는지 모른다. 어떤 작가의 글은 읽다보면 어딘지 모르게 툭툭 리듬이 끊어지는 느낌이 들곤 한다. 대체로 나의 독해 능력 부족이 가장 큰 탓이겠지만, 더러는 작가의 글이 이상한 리듬으로 적혀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태준의 글을 읽다보면, 후루룩-술렁술렁 넘어가는 게 느껴진다. 물론, 글 자체가 옛날에 쓰인 것이기에 생경한 낱말들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 낱말이 우리말의 호흡을 끊어버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낱말의 뜻을 찾느라 사전을 뒤적이는 시간은 어쩔 도리가 없다.)
가을, 수필을 뒤적이는 고상한 취미도 꽤 운치있을 듯하다. 김용준의 글도 좋고, 이태준의 글도 좋다. 피천득, 이효석, 이양하, 법정 스님까지. 책 읽기는 어느 계절이든 좋지만, 가을이라면 수필 한 권 정도 어떠할까.
<책에서>
한번 어느 자리에서 시인 지용은 말하기를 바다도 조선말 '바다'가 제일이라 하였다. '우미'니 '씨'니 보다는 '바다'가 훨씬 큰 것, 넓은 것을 가리키는 맛이 나는데, 그 까닭은 '바'나 '다'가 모두 경탄음인 '아'이기 때문, 즉 '아아'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p.32
저는 목수라 치목(治木)하는 예를 들어 아뢰오리다. 톱질을 해보더라도 느리게 다리면 엇먹고 급하게 다리면 톱이 박혀 내려가질 않습니다. 그래 너무 느리지도 너무 급하지도 않게 다리는 데 묘리(妙理)가 있습니다만, 그건 손이 익고 마음에 통해서 저만 알고 그렇게 할 뿐이지 말로 형용해 나에게 그대로 시킬 수는 없습니다. 아마 옛적 어른들께서도 정말 전해주고 싶은 것은 모두 이러해서 품은 채 죽은 줄 아옵니다. 그렇다면 지금 대감께서 읽으시는 책도 옛 사람의 찌꺼지쯤으로 불러 과언이 아닐까 하옵니다.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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