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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과 새로운 준비를 위한 의식無序錄 2011. 12. 31. 15:33
아침에 출근하러 길을 나서면서 하늘을 쳐다봤다. 군에 들어오면서 시작한 하늘 쳐다보기는 어느새 습관이 되어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여름의 태양도 이제 한풀 꺾였고, 언제오나 기다리던 가을이 코 앞까지 찾아 들어와 있었다.
부대전출 명령이 떨어졌다. 소위로 임관해서 이곳에 온지 2년. 동기들의 대부분과 대다수의 후배들은 소대장으로, 대대급 참모로 군생활을 정리할 참이다. 연대 교육장교직을 마무리 하고, 전역 준비를 하려던 순간에 다시 옮겨가라는 명령. 딱 두 가지가 떠올랐다.
여자친구와 커피.
미안했다. 마냥 남자친구 군에 있으니 기다리라는 쿨한 모습을 보이기에는 너무 미안했다. 며칠이나 머릿속이 하얗게 바랬다. 여자친구도 나도. 업무가 일찍 끝난 오전, 숟가락으로 삽질하듯 입으로 밥과 국을 밀어 넣었다. 아침에 잠깐 내린 비 덕분에 맑게 갠 하늘이 보고팠다. 그러다가 말갛게 갠 가을 하늘을 보는 낭만보다 주린 뱃속에 밥을 밀어 넣는 현실을 우선 택했다. 약간 서글퍼지는 건 가을 탓일 게다.
늘 그렇듯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러 동기 사무실에 가다가 냉동실에 넣어뒀던 원두커피가 생각났다. 삼청동에 가면 늘 들러 마시던 커피방앗간에서 빻은 케냐AA. 발길을 돌렸다. 바쁜 마음에 미처 챙겨 마시지도 못한 커피. 참선하는 기분으로 핸드드립을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심란한 마음을 품고 전기 물끓이개에 물을 넣고 끓인다. 삽시간에 끓어오르는 물. 아무리 명령에 따라 죽고 살아야 하는 군인이지만, 당사자도 모른 채 전기주전자 물 끓이듯 해치워 버리는 인사업무는 섭섭함과 원망이 쌓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번 일로 누군가에게 당분간 풀지 못할 원망과 원한이 맺히고 있다. 아무래도 나는 예수나 부처는 못 될 것 같다.
냉동실에 꽁꽁 얼어버린 커피를 꺼냈다. 냉장실에 있는 스테인리스 머그와 드립퍼를 빼내고, 냉장고 위에 얹어두었던 커피필터를 집었다. 가을빛을 가득 담은 커피필터의 끝을 조심스레 접어 올리고 드립퍼에 끼웠다. 조금 더 오래된 가을빛을 닮은 케냐AA를 쏟아넣고 생각했다. '쓸까, 실까, 어쩌면 향이 다 날아갔을까.'
얼어버린 커피는 그래도 괜찮았다. 굳게 얼어있던 기억이 마들렌 향에 이끌려 나오는 프루스트의 이야기처럼 커피가 살아났다. 아직 살아 있었다. 순간, 슬며시 밀려오는 불안감과 걱정이 머리와 마음을 흔들어 놓고야 말았다. 지금 군에서 보내고 있는 이 순간이 내게 발전이 되지 못한다면, 최소한 예전 그대로 얼려 놓을 수만 있다면 좋겠다-하는 불안감. 이런 불안감은 병사나 장교나 다르지 않다.
오랜만에 내린 커피. 나를 새롭게 하기 위한 의식을 마친 가을. 이제 정리를 시작한다. 2년 간의 이곳 생활을 마치고 또 다른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떠날 준비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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