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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국열차 | 현실을 말하기 위해 잘 가져다 쓴 SF멍석.
    영화/공연 2013. 8. 8. 02:34



    설국열차 (2013)

    Snowpiercer 
    7
    감독
    봉준호
    출연
    크리스 에반스, 송강호, 에드 해리스, 존 허트, 틸다 스윈튼
    정보
    SF, 액션, 드라마 | 한국, 미국, 프랑스 | 126 분 | 2013-08-01
    글쓴이 평점  

    !!! 경고 !!!

    이 글은 엄청난 스포일러를 담고 있고, 길이가 무척 깁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 난독증이 없으신 분들에게 적합한 글입니다.


    1. 배경

    2. '기차'라는 공간, 자본주의와 산업 엔진이 이끄는 열차

    2.1. 순환의 상징

    2.2. 사회, 세계의 상징

    2.2.1. 꼬리칸, 갈등과 분노

    2.2.2. 식수와 식품칸, 생존과 생산

    2.2.3. 교육과 문화의 칸, 알뛰세(L. Althusser) 억압적 국가기구와 이념적 국가기구

    2.2.4. 문명과 쾌락의 일등칸, 이성의 절정에서 몰락으로.

    2.2.5. 세상과 단절된 엔진룸, 과학과 합리성에 대한 환상―테크노크라시

    3. 폭파, 멈춘 기차. 땅을 딛는 요나와 타미.

    4. 요나의 공간, <구약>의 모티프.

     

     

     봉준호 감독의 신작 <설국열차>를 봤습니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봐서 그런지, 극장을 나선 뒤에도 하루 종일 영화가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지구온난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공 냉각을 시행한 인류. 그 부작용으로 빙하기가 닥쳐오게 되면서, 거대한 기차는 인류의 생존공간이 된다는 SF영화였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 SF장르로 분류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신선하게 다루기 위해서 SF로 포장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주제와 구성이 치밀하게 얽혀서 일체감을 주는 영화는 오랜만입니다. 인류의 삶과 공간, 세계를 구성하는 체계(시스템 system), 인류가 나아갈 새로운 방향의 열쇠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서사구조에 쫀쫀하게 붙어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표현력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카메라 앵글과 소품, 배우들의 시선과 몸짓에 이런저런 상징을 숨겨 놓고, 관객에게 '찾아서 맛들 보슈!'라고 장난을 걸어옵니다.


    1. 배경


      우선 배경부터 이야기를 시작할까 합니다. 2014년 근 미래에 인류의 잘못된 판단으로 빙하기가 덮쳐옵니다. 그 기간은 17년 동안 이어지고, 영화의 시간은 2031년에서 2014년의 시간을 다룹니다. 아주 가까운 미래를 설정한 부분도 'SF포장지'의 하나로 보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게 될 시간인 '현실적인 시간'을 다루는 것처럼요. 마치 조지 오웰의 <1984>와 비슷한 느낌 시간적 배경이었습니다.


      영화에서 인간이 유일하게 살아있을 수 있는 공간은 '기차'입니다. 그 자체로 완벽한 생태계를 갖추고 있고, 영구기관을 엔진으로 삼고 있는 기차. 윌포드가 만들고 운영하는 이 기차에서 모든 인류가 살아갑니다. '기차―원작에서는 1001량―'라는 공간은 각 한 칸이 하나의 공간을 이루고 오직 정해진 선로를 따라서 움직이지만, '하나의 기차'입니다. 게다가 '엔진'이 있는 기관차만 동력을 갖고 있지요. 이 영화에서는 '기차'의 이런 공간적 특성이 서사 전개 과정과, 주제 구성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2. '기차'라는 공간, 자본주의와 산업 엔진이 이끄는 열차


    2.1. 순환의 상징


      기차는 1년에 전세계를 한 바퀴 돕니다. 계절의 변화가 있다면 시간의 흐름을 금세 알 수 있겠지만, 빙하기에는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없습니다. 영화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공간의 변화로 바꿔서 보여줍니다. 전투 장면이 한참일 때, '예카테리나 다리'를 지나면서 앞칸쪽 사람들이 '해피 뉴이어'를 외칩니다. 그리고 다시 새해가 시작되고, 전투가 시작됩니다. '1년에 한 바퀴'라는 기차의 '순환'이 굉장히 커다란 상징이 됩니다. 멈추면 굳어버리기 때문에 절대 서지 않는 기차입니다.

    앞에서 썼지만, 기차는 1001량입니다. 처음과 끝이 '1'이 되는 숫자. 기차는 직선으로 놓여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앞과 뒤의 숫자가 '1'로 동일하다는 건, 계속 순환한다는 것과 처음과 끝이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라비안나이트>의 다른 이름인 '천일야화(千一夜話, 1001일 밤의 이야기)'도 같은 숫자를 같은 뜻으로 쓰고 있고요.


      '순환'의 상징은 기차 자체로 그치지 않습니다. 꼬리 칸의 지도자인 '길리엄'과 엔진룸의 1인자 '윌포드'는 서로 통합니다. 한 쪽은 음지에서 은밀하게 '조정'하고, 한 쪽은 양지에서 '조종'합니다. 그리고 혁명의 지도자 '커티스'가 1001번째 꼬리칸에서부터 1,000칸의 열차를 거슬러 올라가 1번 칸의 엔진룸에 도달하는 모습도 전체를 놓고 보면, '순환 선로'처럼 보입니다. 마치 수직적 권력 구조를 전복시키는 구도를 수평선으로 눕히고 앞으로 나아가게 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엔 '완벽하게 구성된 기차 속 권력자의 대체와 순환'의 전개였습니다.


    2.2. 사회, 세계의 상징


      기차는 각 칸마다 일정하고,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여담으로 말씀드리지만, 각 기차의 디테일은 봉감독이 직접 구상하고 꾸민 것이라고 하더군요. 영화 속의 인류는 각자가 '돈'을 주고 산 티켓에 따라 '정해진 위치와 자리'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무임승차를 한 꼬리칸 사람들은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게 '기차'의 규칙 상 당연하게 볼 수도 있겠지요.


      기차는 전인류, 전세계를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의 사회로 볼 수도 있고, 전세계와 인류 전체를 상징할 수도 있습니다만, 제 견해에는 전세계-인류를 상징하는 것 같았습니다. 최하층의 사람들부터 1등칸의 사람들까지 현실에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노동도 없이 원조로 생명을 유지하는 사람도 있고, 채집과 수렵으로 생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목축을 하거나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있지요. 지구의 어떤 곳은 산업화를 이루면서 체계화된 교육을 받고, '현대문명'을 이룩하기도 합니다. 책과 의료기술로 상징하는 지적 성취도 '지금'있고, 패션과 미용, 스파와 사우나도, 클럽과 마약도 모두 현존하고 있는 현실의 모습입니다.


      기차의 각 칸에 있는 사람들처럼, 현실 속의 인류도 세계의 각 나라에 속해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살아갑니다. 자신의 공간과 시간이 고정되어 바뀌지 않을 것처럼 믿고 살아갑니다. TV나 인터넷을 통해 접하는 '다른 세계'의 상황들은 자신과 동떨어진 일로 생각합니다. 1등석 승객이 태연히 책을 읽고, 양복을 맞추는 시간에도 꼬리칸과 3등석에서는 살육의 몸짓이 벌어집니다. 지금 우리가, 영화를 보고 미용실에 가는 순간에도 시리아에서는 내전으로 사람이 죽어가는 것과 같은 현실이 떠오릅니다.


    2.2.1. 꼬리칸, 갈등과 분노


      최하층 꼬리칸의 사람들은 다른 객실 상황은 전혀 모릅니다. 오직 단 하나의 목적만 있을 뿐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생존, 권력의 탈취'만이 유일한 정답입니다. 영화의 종반에 이르러 명확해지지만, 최초의 꼬리칸은 아비규환의 공간이었습니다. 공동체로서의 목적이 없는, 개인의 생존이 절대적 목적이 되는 공간이었지요. 홉스의 말처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공간이었습니다. 생존을 위해 서로가 서로를 사냥하는 곳이었지만, 도덕적 지도자 '길리엄'의 자기희생이 '변화'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개인의 숭고함'이 혼란을 잠재우고, 모래알 같은 개인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뭉쳐놓으면서, 새로운 목적이 생겨났습니다.


      '앞칸의 탈취'는 갈등의 방향을 바꿔서 확대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구성원들의 갈등을 뭉쳐서 밖에 있는 세력에게 향하게 하는 일은 역사적으로도 늘 있었던 전략이고, 지금도 뉴스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는 전략입니다. 구성원 간의 갈등이 잠재해 있을 때, 한 체제의 결속을 위해서는 외부의 적이 필요합니다. 일본의 전국시대가 끝난 뒤, 갈등을 모아서 조선으로 터뜨린 임진왜란도 같은 그림이었고, 냉전시기 자유주의 국가와 공산주의 국가의 대립도 같은 모습이었지요. 매번 미사일 쏘며 시위하는 북한의 모습도 역시 같은 구도입니다. 우리나라도 '무찌르자 공산당'이 정답이었던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전략'은 누군가 구상해야 가능합니다. 기차에서는 열차의 지도자 윌포드와 꼬리칸의 지도자 길리엄의 구상에 의해서 전략이 구체화되었습니다. 기차의 설계자이자 소유자인 윌포드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닫힌 생태계의 완전한 보전'을 위해서 '개체의 조절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개체의 조절을 위한 계기가 필요했고, 그 계기를 길리엄과 함께 만들어 냅니다. '주기적인 반란'을 통해 '명분이 분명한 개체 수 조절'을 하고, '협상'으로 조금씩 보상을 주는 방법을 통해서 말이죠. 이들에게 '분노와 갈등'은 완전한 기차의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 중에 하나였습니다. 장기판의 '졸', 체스판의 '폰'처럼요.


    2.2.2. 식수와 식품칸, 생존과 생산


      커티스는 혁명을 시작합니다. 단숨에 몇 칸을 질러서 '단백질 바'를 생산하는 칸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은 전에 꼬리칸에서 함께 있었던 사람입니다. 꼬리칸의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고, 반가워서 이런저런 말을 걸어보지만, 그 사람은 예전과 다릅니다. 그는 앞으로 함께 나아가자는 제의도 거절하고, 자신의 업무에 만족하며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이어지는 장면도 인상적입니다. 막 만들어져 나오는 단백질 바를 꼬리칸 사람들이 허겁지겁 먹어치웁니다. 그때, '사진처럼 그림을 그리는 사람'과 '커티스'가 '원료'를 보게 되는데, 커티스는 화가에게 '지금 본 건 그리지 마'라고 이야기합니다. 봉감독은 이 장면에서 중요한 힌트 몇 개를 건넵니다.


      하나는 꼬리칸의 사람들이 몇몇은 선발되어서 앞칸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사실과―이것은 바이올리니스트 할배가 앞 칸으로 가는 장면, 혁명 직전에 '타미'의 몸을 줄자로 재고 데려가는 장면에서도 확인됩니다―, 커티스처럼 공공의 선을 목표로 하는 지도자이더라도 진실을 가리는 것은 다른 지도자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사회의 하층민들은 저급한 식품을 정체도 모르고 먹고 살아간다는 '사실'까지.


      그 다음 칸은 식수탱크가 있는 칸입니다. 물을 앞에 두고 거대한 충돌이 벌어지게 됩니다. 봉감독은 이 장면에 피자에 치즈 토핑 뿌리듯이 상징을 담뿍 뿌려둔 것 같았습니다. 어떤 전투보다 치열하게 그려진 것 같았습니다.


      첫째 장면은 '커티스'와 '요나'의 대화입니다. '남궁민수'가 문을 여는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커티스는 '요나'가 문 너머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물어봅니다. 요나는 그의 질문에 웃으며 머뭇거리다가, 갑자기 겁에 질린 목소리로 '열지 마!'라고 소리를 치지만, 그 순간에 문이 열리게 됩니다. 그때 문 너머에서는 중세시대의 사형집행인 코스프레를 한 사람들이 '토마호크 도끼'를 들고 그들을 맞이합니다.


      위에 언급한 장면에서는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커티스가 현재의 목적에 충실한 사람이라면, 요나는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특별한 목적도 없는 사람 같습니다. 현재의 구조에 녹아든 사람은 문 너머의 것을 알지 못하지만, 구조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은 먼저 알게 됩니다. 그러나 요나가 문 너머의 것을 미리 알았지만, 열려버리는 문에서 보듯이 다가오는 현실을 바꾸지 못하고 마주하게 될 수도 있다는 두 가지 은유로 읽혔습니다.


      '사형집행인' 코스프레와 '토마호크 도끼'도 다른 상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사형집행인은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도 역시 그 사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도살'의 업무를 하기 전에는 평범한 사람처럼 함께 섞여서 살아갑니다. 얼굴을 가린 도살자는 자신의 정체를 누구도 모르기 때문에, 마음 놓고 폭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됩니다. 또 모두가 같은 옷으로 '제복'을 입고 있지요. 개인의 입장에서 저지르는 살인이 아니라, 조직의 한 구성원으로서 살인은 '일'이 되어버립니다.


      '토마호크 도끼'는 참 여러가지가 얽힙니다. 토마호크는 아메리칸 인디언이 전투용 도구로 사용한 손도끼입니다. 근접전에서는 직접 가격하기도 하고, 원거리에서는 투척용 도끼로도 사용했지요. 미국 서부 개척시절에 미군의 정예 기병대를 섬멸한 인디언 추장 시팅불(앉은 황소)이 쓰던 도끼의 이름이 '토마호크'라고 합니다. 그리고 현대 미군이 보유하고 있는 '조종해서 목표를 맞추는 미사일'의 이름이 '토마호크 미사일'입니다. 사형집행인처럼, 인디언 전사처럼, 현대 미국의 미사일처럼 '우리는 너희를 섬멸하겠다'는 뜻으로 보였습니다.


      둘째 장면은 싸우기 전에 생선의 배를 갈라 도끼날에 피를 묻히는 것과, 한참 싸우다가 '예카테리나 다리'에서 '해피 뉴이어'를 외치는 살육자들, '야간 투시경'으로 본 터널 속 살육, 그리고 횃불의 등장입니다.


      생선의 배를 갈라서 피를 묻히는 것은 일종의 세리머니로 보입니다. 현대 전투로 빗대서 생각하자면, 전투에 돌입하기 직전에 단체로 얼굴에 정성들여서 위장크림을 바르는 행위와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전의를 다지기도 하고, 오랜만에 맞이한 이벤트를 기념해보자는 주술적인 제의랄까요.


      봉감독의 영화는 관객의 숨통을 계속 쥐어짜지 않아서 좋습니다. 긴장감으로 몰아가다가, 중간에 숨을 한껏 몰아쉴 수 있는 짬을 만들어 줍니다. 그 중에 하나가 '해피 뉴이어'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앞에서 썼지만, '예카테리나 다리'를 건너면서 1년이 다 지나가고 또 1년이 시작됨을 알게 됩니다. 그 순간 "이거 뭐지?!"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하지만 그냥 숨만 쉬라고 그냥 둘 봉감독이 아닙니다. 생뚱맞은 행동을 통해, 살육은 그저 '설날' 이벤트처럼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사건 중에 하나라는 점과, 승리가 예정되어 있는 이벤트라는 점이 확실해졌습니다.


      백병전은 흡사, 혁명군이 우세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앞 칸의 도살자들이 야간 투시경을 쓰면서, 분위기는 다시 한 번 반전됩니다. 어둠 속에서 무차별적인 살육이 다시 벌어지고 맙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광주의 시민군과 전두환의 군대가 떠올랐고, 동학혁명의 죽창과 정부군-일본군의 조총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또 한 번, 역전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남궁민수가 갖고 있었던 성냥 두 개. 지금껏 누구도 뚫지 못했던 객실에서 커티스가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 냅니다. '횃불'을 가지고 와서 '답답한 상황'을 깨뜨리게 됩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수족관과 고기 냉동칸, 농사를 짓는 칸에서는 큰 다툼이 없습니다. '식수'가 이번 혁명―또는 반란―의 '잠정적 협상선'이었던 거지요. 식수를 확보하면서 전투는 일단락이 됩니다. 길리엄은 '식수를 확보했으니, 협상하자'는 말을 꺼냈지만 커티스는 '엔진 탈취'를 고수합니다. 마치, 보수주의에 대항하는 진보주의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중간까지의 길은 같지만, 서로 바라보는 곳이 다르기 때문에 쉽게 분열하고 마는 진보진영의 그림자처럼 보였습니다.


      그곳에서 열차의 '총리'인 '메이슨'을 생포하게 됩니다. 메이슨의 입을 통해, '식수'탱크의 물 역시, 엔진룸에서부터 오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엔진의 열기로 눈과 얼음을 녹여서 물탱크로 옮긴다는 설명은, 생명체 생존의 기본 조건인 물조차 자본주의에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로 읽혔습니다.


      또 하나 메이슨에게서 읽을 수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커티스에게 협조하겠다면서, "나도 살고 싶어서"라고 말을 하고는 '틀니'를 뺍니다. 짧은 장면이었지만, 메이슨의 틀니 뺀 표정에서 '이빨 빠진 호랑이'가 보였습니다. 정치의 실질적 우두머리인 총리가 사실은 열차를 이끌어가는 윌포드의 이빨 빠진 종이 호랑이에 지나지 않았다는 힌트였지요. 현대 사회의 정치 역시, 자본주의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봉감독의 은유처럼 느껴지기도 했고요.


    2.2.3. 교육과 문화의 칸, 알뛰세(L. Althusser) 억압적 국가기구와 이념적 국가기구


      메이슨을 앞세워 식품과 생산의 칸을 넘어서 처음 마주하게 되는 객실은 '학교 칸'입니다. 먹고 사는 일이 충족된다고, 그 즉시 사회가 잘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경찰과 군대, 폭력으로 통치를 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방법은 교육을 시키는 일입니다. 한 사회의 구성원이 '역사'와 '전통'을 배우고, 그 '가치'를 공유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의 안정화가 이루어지기 마련이지요. 과거에 발생한 사건은 '있던 현상'이지만, 그 현상을 역사와 전통으로 만들고 가치를 부여하는 과정은 교육과정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념적 필터를 거치게 됩니다.


      알뛰세라는 철학자의 이야기는 설국열차의 앞칸과 뒤칸을 '통제'하는 방법에 대해 그럴듯한 설명이 될 것 같습니다. 이 할배는 자본주의 사회가 두 가지 국가기구를 수단으로 체제를 안정화 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억압적 국가기구'인데, 꼬리칸에서 익히 본 '경찰, 군대, 감옥'과 같은 합법적 폭력을 사용해서 질서를 유지하는 국가기구입니다. 다른 하나는 '종교, 교육, 법, 문화, 커뮤니케이션'과 같은 합의적된 이념을 사용해서 질서를 유지하는 이념적 국가기구입니다.

     

      억압적 국가기구는 공식적으로 하나의 실체로 나타나지만, 이념적 국가기구는 공적/사적으로 일상에 여러 겹으로 존재합니다. 꼬리 칸의 사람들은 억압에 의해서 질서가 유지되지만, 언제나 분노를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칸으로 갈수록 이념적 국가기구에 의해 질서가 재생산됩니다.

     

      과거의 실패한 '반란'과 '윌포드'의 위대함은 어린 학생들에게 '교훈'과 '역사'가 되어 주입됩니다. 교사는 노래와 비디오로 '윌포드'의 공적을 찬송합니다. 학생들은 또 차창 밖에서 얼어 죽은 꼬리칸 사람들을 '견학'하면서, '밖에 나가면 죽는다'는 것을 되뇝니다. 몇 가지 사실을 통해 끝없이 이야기를 만들고, 의미를 덧붙여 갑니다. 학생들은 계속 그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마음속에 새겨두고, 점점 더 그 틀 안에 자신의 가능성을 가두게 됩니다. 그렇게 어떤 학생은 노동자가 되고, 어떤 학생은 중간 관리자가 되고, 군인이 되거나 지식인이 되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의 교육도 자꾸 그렇게 바뀌어 가는 것 같아서 가슴이 서늘해졌습니다.

     

    2.2.4. 문명과 쾌락의 일등칸, 이성의 절정에서 몰락으로.

     

      학교 객실에서 벌어진 총격전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게 됩니다. 길리엄이 죽고, 꼬리 칸에서는 정확하게 계산된 총격이 이루어집니다. 그동안 커티스는 엔진룸을 향해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때 스치며 바라보는 공간은 지금 우리가 평온하게 누리는 '문명의 일상'입니다. 조용한 객실에 편안히 앉아서 독서를 하는 노인, 치과 치료를 받는 사람, 재단사에게 맞춤 양복을 만드는 노신사를 스치듯 지나갑니다. 그리고 지성과 문화가 꿈틀거리는 카페를 지나고 나면, 정신문화의 몰락이 시작됩니다.

     

      화려한 옷차림과 미용실, 스파와 사우나를 지나면 클럽과 마약에 취한 공간이 나오게 됩니다. 설국열차의 1001칸의 구조가 다시 떠오르게 됩니다. 밑바닥에서 출발해서 상승구조를 이루며 올라갑니다. 육체적 욕구 충족을 위한 공간에서 정신적 욕구 충족을 위한 공간으로 올라갑니다. 정점에 이르게 되면, 다시 급격한 하강구조를 그리면서 말초적인 욕구를 위한 공간으로 내려갑니다.

     

      이 영화는 닫힌 공간 속에서 계속적으로 순환과 반복을 이야기합니다. 계속되는 반복이지만, '변화의 계기'를 끝까지 제시합니다. 장난감 자동차가 트랙을 뱅글뱅글 돌다가, 자갈 때문에 위로 튀어 오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치 나선형으로 상승하는 완만한 계단을 보는 것 같습니다. 꼬리칸 승객들은 쓰레기 음식을 먹지만, 산업폐기물 '마약'을 멸시합니다. 그런데 가장 앞칸에 있는 승객들은 스테이크와 와인을 마시지만, 산업폐기물 마약에 찌들어 있습니다. 상승과 몰락 곡선이 동시에 나타나는 장면이 가장 명료하게 드러난 부분이었습니다.

     

    2.2.5. 세상과 단절된 엔진룸, 과학과 합리성에 대한 환상―테크노크라시

     

      엔진룸에는 윌포드가 있습니다. 그는 엔진을 보살피면서 기계가 잘 작동하도록 관리합니다. 기차에 모든 것을 바친 사람처럼 보입니다. 지금 존재하는 기차가 인류의 마지막 생존공간이라는 것을 잘 알고,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화를 내지 않고, 정확한 계산에 의해서 '기계처럼' 움직입니다.

     

      "W" 문장이 박혀있는 단단한 문으로 세상과 격리되어 있는 순수이성의 공간처럼 보였습니다. 고전경제학에서 가정하는 '합리적 경제인'과 '자본과 결합한 산업'을 한 컷에 담아낸 것 같았습니다. 윌포드는 자연스럽게 몇 가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W의 거대한 문장은 미국의 월스트리트를 떠올리게 하고, 자동차의 왕 헨리 포드가 연상되지요. 자연스럽게 자본주의와 산업화, 과학기술로 생각이 흘러갑니다. 기차 자체가 산업혁명의 산물이자 상징입니다. '성스러운 엔진'으로 불리며 '종교'가 되어버린 '과학기술'은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도저히 살 수 없는 환경에서 인류를 살아남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이라는 신념은 지금 인류의 지도자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신념인 것 같습니다. 하버마스는 현대 사회의 이러한 현상을 지적하면서, 테크노크라시의 이념화를 이야기합니다. 삶의 모든 문제는 '과학과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며, 사회 구성원의 물질적 욕구를 만족시키고, 자본주의 사회 체제를 유지하는 데 효과적인 이념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러한 이념이 모두의 마음에 자리 잡게 되면, 모든 사람들은 하나의 '물건, 부속, 부품'이 되고 맙니다. 봉감독은 자본주의의 한계를 비유와 상징을 통해서 관객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3. 폭파, 멈춘 기차. 땅을 딛는 요나와 타미.

     

      엔진룸의 거대한 문, 그 앞까지 도착한 사람은 단 세 명이었습니다. 커티스와 남궁민수, 그리고 요나. 그들의 목적은 '문'을 여는 것인데, 그 방향이 서로 조금 달랐습니다. 커티스는 코앞에 있는 엔진룸의 문을 여는 것이었고, 남궁민수는 바깥으로 향하는 문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커티스는 엔진룸에 들어가 윌포드를 만나고, 자신의 목적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윌포드는 노쇠한 자신을 대신해서 커티스를 차기 지도자로 정해둔 상태였습니다. 커티스는 정해진 경로를 따라 자신이 이끌려 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윌포드의 유연하고 솔깃한 설득을 커티스는 거부합니다. 어쩌면 잡아먹혔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타미를 엔진 기관실에서 만나게 됩니다.

     

      남궁민수는 휘발성 환각제인 '크로놀'을 모은 이유를 커티스에게 이야기합니다. 열차에서 지켜본 바깥의 환경의 변화를 살피면서, 빙하기가 끝나간다는 확신을 얻었던 것 같습니다. 기차의 진짜 열쇠는 문을 열던 남궁민수였던 것 같습니다.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기차 안의 생태계는 그 유지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갈등과 반목이 계속됩니다. 더 이상의 변화는 없습니다. 스스로 조직에 동화되거나, 기차를 운영하는 생태계 속의 일부가 될 뿐입니다. 윌포드도 영생을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남궁민수는 바깥으로 향하는 문에 크로놀 폭약을 설치하는 데에 성공하고, 요나는 하나 남은 성냥으로 불을 붙이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변화가 동심원에서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미세한 디딤돌이었다면, 남궁민수와 요나가 불을 붙인 폭약은 궤도를 파괴하는 변혁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커다란 변혁은 반드시 희생을 요구하는 법인가 봅니다. 남궁민수는 요나와 함께 엔진룸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려 했지만 닫히지 않습니다. 그때, 민수와 커티스는 품에 요나와 타미를 꼭 안고 폭발로부터 두 아이를 구해냅니다. 성인의 세계는 이렇게 닫히고, 자유 분방한 18세 요나와 6세 타미가 하얀 눈 위에 발을 내딛습니다. 마치 달에 첫 걸음을 내딛는 인류처럼.

     

    4. 요나의 공간, <구약>의 모티프.

     

      고아성의 극중 배역은 '요나'입니다. 요나는 <구약>에 등장하는 예언자의 이름이기도 하지요. 요나는 신이 부여한 사명을 피하려고 했다가 위기를 맞게 되고, 고래의 뱃속에 들어갔다가 살아나온 사람입니다. 그의 자세한 사정은 아래의 지식백과에서 발췌한 내용과 같습니다.

     

    요나는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네베(니느웨)로 가서 그곳 주민들을 회개시키라는 신의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적인 아시리아인들을 회개시켜 용서받게 하기는 싫었다. 그의 마음을 알고 있는 신은 사나운 폭풍을 일으켜 그가 탄 배를 뒤흔들었다. 요나는 개의치 않고 배 밑창에 들어가 잠을 잤다. 사람들은 신이 노한 원인을 캐내기 위해 제비뽑기를 했다. 요나는 신이 자신에게 의무를 일깨워주기 위해 폭풍을 일으켰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바다에 빠지겠노라고 나섰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 요나는 고래 뱃속에서 기도를 올렸다. 사흘이 지나자 고래는 그를 마른 땅에 토해냈다. 요나는 신이 명한 대로 니네베로 갔다. 그가 전할 내용은 간단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그랬더니 놀랍게도 니네베의 이교도들은 물론이고 왕까지도 회개했다. 요나가 실망한 기색으로 돌아오자 신은 그에게 니네베의 백성들만이 아니라 짐승들도 소중하다고 말했다.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네이버 지식백과] 요나와 고래 [Jonah and the whale] (『바이블 키워드』, 2007.12.24, 들녘)


      봉감독은 요나의 이야기를 모티프로 삼아서, 극중 인물의 이름을 붙인 것 같았습니다. 문 너머에 있는 것을 감지하고, 원수를 미워하지만 결국엔 모두를 품는 모습이 그렇고, 거친 자연 환경에서 다시 사명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준비하는 공간으로서의 기차 속 공간이 묘하게 고래의 뱃속과 유사하게 보였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요나와 타미가 북극곰을 발견하며 놀라고, 북극곰이 멀뚱하게 바라보는 모습으로 끝이 납니다. 북극곰이 마지막에 나온다는 점에 봉감독, 참 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원작 만화는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영화의 첫 장면이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한 인류의 과학기술과, 그 부작용으로 생긴 빙하기가 인류를 위협하게 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지구 온난화의 피해 동물의 상징은 모두가 익히 알고 있듯, 북극곰입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눈 덮인 산에서 여유롭게 움직이는 북극곰으로 마침표를 찍고 있습니다. 수미상관(首尾相關)의 완결이지만 열린구조.

     

      1001량의 기차, 1년마다 순환하는 선로, U자형 선회 구간, 반복적인 살육, 구성원의 재생산, 부활을 기다리는 요나, 빙하기에서 해빙기의 반복까지. 영화의 시작과 끝, 그리고 중간마다 계속 내용이 그라데이션처럼 드러납니다. 영화를 볼수록 구석구석에서 퍼즐조각이 하나씩 발견되는 1001피스짜리 직소퍼즐을 맞춰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마지막 북극곰의 눈동자가 봉감독의 눈처럼 보였습니다.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영화를 보고, 하루 종일 뒤척이며 고민한 그의 질문은 이런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거대한 자본과 과학기술이 우리를 이끌어가도록 그대로 둘 것인가, 아니면 거친 세상으로 인류 최초의 걸음을 내딛을 것인가. 폭발적인 변화의 계기가 없다면, 무엇을 하든 닫힌 기차 안에 있을 뿐이다. 어떤 것을 원하는가?"

     

      인간다운 걸음을 걷고 싶습니다. 이 영화에 대한 제 대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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