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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멜랑콜리아
    영화/공연 2012. 12. 24. 18:03




    멜랑콜리아 (2012)

    Melancholia 
    8.2
    감독
    라스 폰 트리에
    출연
    커스틴 던스트, 샬롯 갱스부르, 키퍼 서덜랜드, 샬롯 램플링, 존 허트
    정보
    미스터리, 판타지 |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 135 분 | 2012-05-17
    다운로드 글쓴이 평점  


      무표정한 여자의 얼굴. 추락하는 새. 아이를 안고 진창에서 절규하는 여자. 주저 앉는 검은 말. 처음부터 음습한 이미지로 영화는 시작한다. 이야기는 저스틴의 결혼식부터 출발한다. 하얗고 커다란 리무진은 좁은 길목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멈추고, 결국 신랑 신부는 걸어서 결혼식장으로 향한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신부―저스틴―의 행동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어머니의 시니컬한 축사를 들을 때부터 표정은 굳어간다. 그러다 저스틴은 웨딩드레스를 벗어던지고 욕조에 몸을 담근다.

     

      영화는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저스틴의 결혼식을, 2부는 저스틴의 언니인 클레어의 이야기를 다룬다. 1부에서 보이는 저스틴의 행동은 일상적인 시각에서 보면 절대 이해할 수 없다. 행복한 결혼식 날, 저스틴은 신랑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명확한 설명도 없다. 게다가 결혼식에서 처음 만난 남자와 골프 필드에서 첫날밤 의식을 치뤄버린다. 자신의 사장에게 참고 있던 모든 울분을 토해내며 모욕을 줘버린다. 1부만 놓고 보면, 저스틴의 이런 행동은 절대 이해할 수 없다. 우울증의 증세 치고는 너무나 이상하다. 그러나 2부, 영화의 마지막까지 보고 나면, 온몸으로써 저스틴을 이해할 수 있다.

     

     

    #1. 우울증의 원인, '소멸'

     

      우울증―멜랑콜리아―의 존재 원인은 '소멸'이다. 이 영화는 쉽게 다가오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 '소멸과 죽음'을 지구와 충돌하는 행성 '멜랑콜리아'를 통해 구체적으로 그려냈다. 소멸. 아무 것도 없음. nothing. 이런 개념을 우리는 좀처럼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보통은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한다. 우리가 죽더라도, 우리의 아이들, 친구들, 나무와 꽃, 동굴와 산맥은 지구와 함께 존재할 거라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는 이런 고정관념까지 허물어버린다. 행성 멜랑콜리아와 지구의 충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사건을 통해서.

     

     

    #2. 미리 안다는 것의 그림자, '우울과 광기'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신과 같은 예지력을 지녔지만 앞을 보지 못한다. 델포이의 신탁을 전하는 무녀들 역시, 자신의 정신을 잃어야만 예지력을 지닌다. 우리나라의 무당도 신이 내리기 위해서는 정신을 놓아야 한다. 미래를 보는 자는 현재 자신의 눈 앞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기에, 현실과 맞지 않는 일들을 벌이며, 현실로부터 격리된다.

     

      저스틴은 델포이의 무녀 같았다. 모든 것의 소멸을 다른 누구보다 먼저 느끼고, 공포에 떨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었다. 그런 저스틴을 달래고, 위로하는 언니 클레어에게도 불안함이 있다. 2부에서는 클레어의 불안감. 행성과의 충돌에 대한 불안감을 이야기 한다. 천문학자인 그의 남편은 시종일관 클레어를 다독이며, 과학의 힘에 기대어 안심시킨다. 어쩌면 현실에서 가장 합리적일 것 같았던 이 사람은, 행성이 근접한 순간 아내를 위로했다. 하지만 그 다음 날 아침, 과학적 수단을 통해 '멜랑콜리아' 충돌을 계산하고나서 가장 먼저 자신을 소멸시켜버렸다.

     

     

    #3. 존재에 대한 냉정한 위로

     

      이 영화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표현해낸다. 죽음, 소멸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1998년, 마이클 베이 감독의 <아마겟돈>에서는 소행성을 앞 세대의 희생으로 극복하고, 다음 세대의 삶이 이어진다. 그러나 사실 삶은 죽음을 전제로 삼는 과정이다. <멜랑콜리아>는 영원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젊은 사람도, 어린 아이도 소멸할 존재라는 것을 냉정하게 비춰버린다.

     

      따뜻한 노란 빛을 비추는 달은 왼쪽 하늘에 떠있고, 차갑고 푸른 빛을 내는 '멜랑콜리아'는 오른쪽 하늘에 떠있다. 어두운 밤을 비추는 달은 현실에서 언제나 마주하고 있지만, 죽음의 행성 '멜랑콜리아'에 대해서 우리는 늘 모르는 척 살아간다. 그러나 언젠가 그 행성을 인지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반드시 온다.

     

     

    #4. 목적론과 허무론에 대한 거부

     

      영화의 끝에 이를 즘.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된다. 나는 무엇을 하며 소멸해 갈 것인가. 허무는 답이 될 수 없다. 무엇을 위해 살아간다는 답도 정답이 될 수 없다. 소멸하는 존재를 깨닫고 허무에 점령당하면, 그 존재는 스스로 소멸하기 마련이다. 무엇을 위하여 살아갈까―하는 물음도, '무엇'이 결국 필연적으로 대부분 소멸할 존재들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답이 되지는 않는다. 답은 신神일까. 그것도 긍정하기 어렵다.

     

      소멸하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우울하다. 필연적인 소멸. 영화의 크레딧이 모두 올라갈 때까지 멍하게 화면만 바라봤다. 잠정적인 답은 이것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죽어가는 과정의 아름다움을 빚는 게 존재의 소명이 아닐까. 숭고한 삶의 과정을 빚는 것도 좋고, 우아한 삶도 좋다. 비극적인 삶을 그려가는 것도 그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고, 해학적인 삶도 또한 가치있는 과정이지 않을까 싶었다.

     

      진심으로 서러워져 울고 싶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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