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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축학 개론
    영화/공연 2012. 10. 17. 14:49





    건축학개론 (2012)

    8.6
    감독
    이용주
    출연
    엄태웅, 한가인, 이제훈, 수지, 조정석
    정보
    로맨스/멜로, 드라마 | 한국 | 118 분 | 2012-03-22
    다운로드 글쓴이 평점  



      건축은 사람의 삶을 품고 있다. 건물을 지을 때, 건축주와 건축가(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도면으로 옮기는 설계자의 역할로)는 한참을 대화해야 한다. 어떤 동네에 어떤 집을 어떤 구조로 지을지 함께 생각해야 한다. 게다가 건축법도 그 테두리를 정해두고 있다는 걸 고려해야 한다. 연애의 과정과 집을 짓는 과정은 매우 닮아있다.


      <건축학 개론>은 첫사랑과 건축―특히 집―을 잘 버무려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 낸 수작이다. 배경음악으로 사용하고 있는 90년대 초반의 노래들도 비빔밥의 고명처럼 아주 잘 어우러진다.


    1. 기억의 습작―자이가닉 효과


      심리학 용어에 "자이가닉 효과(Zaiganik effect)"라는 것이 있다. '완결된 과제는 쉽게 잊혀지지만, 중간에 그만 둔 과제는 2배 가까이 더 선명하게 떠오른다'는 걸 실험으로 밝힌 내용이다. 보통 첫사랑이 잊히지 않는 이유를 이 용어로 설명하곤 한다.


    "많은 날이 지나고, 나의 마음 지쳐갈 때 내 마음 속으로 스러져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찾아와 생각이 나겠지. 너무 커버린 미래의 그 꿈들 속으로 잊혀져 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생각날까." 전람회 <기억의 습작> 중

      첫사랑의 기억은 현실 냄새가 진동하는 사랑에 마침표를 찍었을 때, 불현듯 떠오른다. 이 영화에서 '서연'이 '승민'을 찾아오는 계기는 '습작 같았던 사랑'에 대한 회상이었을 것이다. 다만, 그런 상황이 현실에서 얼마나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하는 개연성의 문제로 비판받을 수 있는 부분이다.


    2. 설계 변경


      건물을 짓다보면, 어느날 갑자기 건축주에게 전화가 걸려오는 날이 이따금 있다. "거실을 좀 넓혔으면 좋겠는데요"라든가 "다른 공간이 더 필요해요" 따위의 갑작스런 요청이 생긴다. 그런 일이 생기면, 건축가는 골치가 아프다. 어디에서부터 다시 손을 대야 할 것인지, 관련 법규에 저촉되는 부분은 없는지 다시 뒤적거려야 한다. 하지만 건축가는 결국 대부분 건축주의 의견에 따라 가기 마련이다.


      아버지는 서연이 다시 피아노를 치기를 바랐지만, 서연은 '재수없던 기억'으로 남았던 '피아노'는 삶에서 지우려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면서, '서연'의 마음이 달라졌다. 그리고 집을 지으려던 설계가 달라진다. 피아노 방이 생기고, 2층에 서연의 방이 생기게 된다.


      인생도 '설계 변경'과 비슷하다.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계획을 가지고 살아도, 어느날 갑자기 돌발적인 사건이 삶을 뿌리째 뒤흔들게 된다. 어릴 때 그렸던 장래희망은 바뀌기 쉽고, 사람들은 또 그렇게 '플랜B'를 쥐고 그렇게 살아간다.


    3. '매운탕'과 '집'과 '인생'


      영화 중반 쯤, 승민과 서연은 제주도에서 다투게 된다. 그때 승민은 서연이 '돈 많고 혼자 사는 여자라, 여유 있는 거다'라며 서연의 상처를 건드리고 만다. 장면이 바뀌고, 승민과 서연은 '매운탕'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눈다. 그때 서연의 취중진담.


    "다른 탕들은 재료가 바뀌면 이름도 바뀌는데, '매운탕'은 그 안에 뭐가 들어가도 다 매운탕이야. 꼭 나같아."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에 이런 말이 있다. "말에 수없이 형용사가 나타나면, 그것은 언어가 없다는 기호이다." 아주 걸죽한 욕설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것도, 바로 적확하게 그 언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연애편지에 꾸미는 말이 넘치는 것도 '사랑'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어서다. <건축학 개론>에서는 그 '말'을 잘 찾아낸 것 같다. 우리는 '알탕'을 꿈꾸며 살아가지만, 하다못해 '잡탕'도 못되고 그저 뭐가 들어가도 매한가지 '매운탕'처럼 느껴지는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한가인이 욕을 하는 것도 이해가 되고, 위로가 된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집'과 '인생'도 그렇다. 집도 모두에게 그저 '집'이지만, 매운탕에 들어가는 재료들이 다양한 것처럼 '집'도 각자의 인생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각자의 삶은 기억이 곳곳에 남아 '집'을 이루게 된다. 서연의 키를 새긴 벽이라든가, 꼬마 서연이 콘크리트 바닥을 마르기 전에 밟아 만든 발자국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아버지의 기억처럼. 승민이 스무살에 발로 차서 찌그러뜨린 녹슨 대문처럼, 집에는 사람의 인생이 담기게 된다.


      그렇게 모두에게 그저 '집'으로, '인생'으로, '첫사랑'으로 불린다. 하지만 '매운탕'의 맛이 모두 다르듯이 사람의 인생도, 첫사랑도 집도 다른 기억을 담고 있게 마련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서연의 시선과 아버지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는 것도 그렇게 읽힌다.


      중간에 멈춘 첫사랑의 재시작과 종결. 서로에게 남아있던 기억은 집을 짓는 과정으로 해소하고 종결. 기억은 그저 기억으로 남기고, 우리는 모두 그저 오늘을 살아간다. 현실에서 찾기 힘든 첫사랑에 마침표를 찍고 정리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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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oem_정원사_책들이 있는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