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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온 바다에서 차를 마시다문학 2012. 12. 24. 23:36
따뜻한 녹차 한 잔을 두고 마시는 기분을 느낀다. 푸근하게 우려낸 녹차는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고민의 갈림길을 만든다. 따뜻한 연둣빛 생명수를 목으로 단숨에 넘길 것인가, 천천히 내음을 느끼며 흘려 넣을 것인가. 이해인 수녀가 적은『와온 바다에서 茶를 마시다』의 여는 글을 읽기 시작하며, 어제 오후에 마시던 녹차를 떠올렸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단숨에 읽고 싶은 마음과, 남은 이야기가 줄어만 가는 것에 아쉬움을 느끼며 천천히 곱씹으며 읽고픈 마음. 분량이 많지 않은 이 책을 사흘에 걸쳐 마셨다.
차는 신기한 힘이 있다. 어색한 만남을 훈훈하게 풀어주는 마력이 있다. 작년에 있던 일이다. 좀처럼 잘 울지 않는 나의 뻐꾸기─당시엔 검은색 폴더였다─가 낯선 번호를 연방 지저귀고 있었다. 열 개 조금 넘는 숫자로, 다른 사람을 알아 낼 수 있는 게 좋은 일인가 잠시 망설인다. 그러나 잠시 후에 내가 뻐꾸기 입을 벌리고 하는 말. "네, 여보세요?" 갑자기 밝은 목소리가 저편에서 들려왔고, 나는 그가 고교 졸업 후에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친구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하. 히히. 껄껄. 크큿. 우리는 고교 시절 자주 들르던 인사동의 한 찻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사년 만에 보는 친구는 새까맣게 그을렸다. 곧 제대를 한다 했다. 짧은 인사만 몇 마디 나누고 우리의 목적지로 눈길을 돌리고, 발길을 옮겼다. '지대방' 언제나 푸근하다. 은근한 조명과 반기는 미소를 보내는 아줌마와 아르바이트생이 반갑다. 나와 친구도 미소를 연방 날리고, 한가한 자리를 찾아 앉아서 차를 주문한다. 세작 하나, 말차 하나요. 그렇게 나는 우리고, 친구는 대나무 솔을 놀린다. 말 한 마디는 기어코 차 한 모금을 마셔야 나오기 시작하고, 그렇게 오가기 시작하는 이야기에 찻물이 식어갔다.
열한 사람의 차에 대한 에세이. 나의 이야기는 소소한 일상의 하나다. 여기에 실려 있는 문장가들의 이야기도 그들의 소소한 삶이다. 과장도 없다. 담박한 맛의 녹차 티백처럼 자연과 어울려 오늘을 보내고 있는 그들을 느끼게 한다. 한 잔에 오만 원이나 하는 사향고양이 똥 커피보다 값은 싸지만, 차 한 잔을 권하는 사람의 마음이 훤히 보이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자연을 사랑하고, 차를 사랑하고, 자연을 닮은 사람을 사랑하는 글쓴이들의 마음이 전해져 온다.
차 마시기에 보탬이 되는 부분은 부록에 있다. 나는 부끄럽지도, 자랑스럽지도 않다. 나는 차의 맛을 잘 알지 못한다. 떫고, 쓰고, 담박하다는 세 가지 기준으로 '내 차'를 가려낸다. 다도라고 하기에 초라한 물 끓이기와 우려내기가 전부다. 차의 종류도 세세하게 알지 못한다. 꼭 그 정보를 알지 않아도 좋지 않을까싶다. 그러나 이 책에 담긴 차에 대한 정보는 도움이 되었다. 다홍치마에 꽃 수까지 놓을 수 있는 가르침이 있다면, 따라도 좋지 않을까.
덖은차. 그리고 담박한 막사발. 꾸밈 없는 우리의 다도. 요즘 많이 알려진 일본의 다도와 다른 부분이 보인다. 열한 사람의 이야기 속에도 자연스러움과 사람의 이야기가 피어난다. 지금 당장 냄새나지 않는 개펄이 보이는 바닷가에서, 은은한 차 한잔을 우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하지만 그 사치를 위해 달려가기 보다, 옆에 있는 그 사람과 녹차 티백으로 한 잔씩 우려서 나눠 마시는 것도 아름다운 사치가 될 수 있을거라.
"……너무 먼 훗날 말고, 가까운 훗날에 알래스카로 녹차 한 상자 다시 보내고 싶습니다. 이런 편지도 함께 써서요. 서울도 춥고 외롭거든. 네 생각 나면 나도 한잔 마실게, 너도 내 생각 나면 한잔 마시렴……." -조병준 pp.22
"나는 바닷가에 주저앉아 차 한잔을 우립니다. 옛 선승들이 유일하게 누린 사치가 차 사치였다지요. 지금의 내가 그렇습니다. 달빛 아래 허리 굽히고 앉아 천천히 차를 내는 동안 바다는 만파식적의 경지에 이릅니다." -곽재구 p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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