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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 버지니아 울프문학 2012. 1. 7. 15:47
- 자기만의 방 (양장)
- 국내도서>시/에세이
- 저자 : 버지니아 울프(Adeline Virginia Woolf ) / 김안나역
- 출판 : 북스토리 2008.03.15
내가 왜 이 책을 집어 들게 됐을까. 서점을 혼자 어슬렁거리다, 만나기로 했던 친구가 갑자기 나타난 바람에 얼결에 사버린 책이었다. 버지니아 울프―"처녀 늑대". 왜일까. 이름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의 조화. 처녀와 늑대가 잘 어울리지 않아서였을까. 울프 누나의 이름을 들으면 이런 0kcal의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1. 페미니스트 울프 누나는 휴머니스트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았다. 둥근 달을 등지고 언덕에 올라 여성의 해방을 부르짖는 처녀 늑대의 모습. 그 모습이 선하다. 울프 누나가 나고 자란 영국에서는 20세기 초반에야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기 시작했다. 요즘에야 귀찮아서 투표를 안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투표 할 수 있는 권리는 어렵사리 얻게 된 최근의 일이다.
범선이 일으킨 상업혁명을 지나, 증기기관이 산업혁명을 일궈내면서 사회는 경제, 정치, 문화의 모든 방면으로 달라졌다. 삶의 중심축이 사람으로부터 자본으로 옮아가버렸다. 이제는 머루랑 달래랑 먹으며 사랑을 나누는 세상은 가버렸다. 음유시인의 세상은 사라져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중요하지 않는 문제에 관한 한 가지 의견, 즉 여성이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신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뿐입니다. -p.18
그렇다. 두 발로 설 수 있는 힘은 '돈'과 '자신만의 공간'에서 피어난다. 돈이 있다면 세상과 구차하지 않게 소통할 수 있으며, 자신만의 공간을 영위하게 되면 행동과 생각의 자유를 얻게 된다. 돈과 자신만의 공간. 울프 누나의 말대로 '문학'을 하려면 이 두 가지 조건이 채워져야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두 가지 조건을 채울 수 있을까. 당시의―오늘도―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거론하고 있지만, 2008년 오늘의 돋보기를 가져다대면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해당된다.
'문학', 특히 소설을 쓴다는 일은 본질적인 일이다. 생각할 여유가 있고, 쓸 수 있는 시간과 장소가 필요하며, 무엇보다 읽고 쓸 수 있는 교양 교육이 필요한 작업이다. 게다가 확실하게 수입이 따른다는 보장도 없다(!). 울프 누나가 그저 조곤조곤 말을 풀어 놓는 듯하지만, 여성―사회적 약자― 모두에게 '돈'과 '자기만의 방'을 갖기를 설득하고 있었다. 남성에게, 사회적 강자에게 비굴해지지 않고, 자신의 두 다리로 설 수 있는 힘의 근원을 일러주고 있다.
#2. 언제나 현실과 타협 중
현실과 이상의 거리는 지구에서 안드로메다까지. 230만 광년의 비교적 가까운 은하지만, 멀긴 멀다. 언젠가는 돈을 많이 벌어서 이 지긋지긋한 회사를 때려치우고, 나만의 번듯한 가게를 열겠다는 꿈. 이대로 회사에게 나의 진액을 모두 빨려버리고, 말라비틀어지는 악몽을 헤매는 직장인의 마음. 현대인 누구나가 느끼고 있을 법한 감정을 울프 누나는 꼭 짚어서 풀어놓았다.
우선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늘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일을 노예처럼 아부하고 아양을 떨면서 하고 있다는 것,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항상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필요한 듯이 보였으며, 또한 위험을 감수하기에는 너무 큰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러나지 않으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나의 재능이―비록 미미하지만 나 자신에게는 소중한 재능이―소멸하고 있으며 그와 함께 나 자신, 나의 영혼도 소멸하고 있다는 생각, 이 모든 것들이 마치 봄날의 개화를 잠식하여 나무의 생명을 고갈시키는 녹병(綠病)처럼 느껴졌습니다. -p.87
현실을 도외시할 수 없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타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으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재능과 함께 나 자신, 나의 영혼도 소멸하고 있다는 생각"에 쫒기면 곤란하다. 두 다리로 곧게 서는 것이 우리의 필요조건이지, 포르쉐를 타고 다니는 게 필요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잡소리가 가득한 이 책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다. 이제는 꽤 옛날 얘기가 되어버린 시절의 잡담이 많이 들어있어서, '아, 그런갑다'하고 넘어가도 되는 분량이 꽤 된다. 얘기하고 있는 바탕이 정말로 굵직한 것이어서 가볍게 읽고 던질 책도 아니다. 애매모호한 느낌을 주는 글이지만, 하여튼 몇 가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책에서>
위대한 작품은 그 하나로 혼자서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여러 해에 걸친 공통의 생각, 많은 사람들의 생각의 결과로, 하나의 목소리 이면에는 다수의 경험이 있는 것입니다. -p.150
지적인 자유는 물질적인 것에 의존합니다. 시는 지적인 자유에 의존합니다. 그리고 여성은 단지 이백 년뿐만 아니라 역사가 시작된 이래 늘 가난했습니다. 여성에게는 아테네 노예의 아들보다도 지적인 자유가 더 적었습니다. 그래서 여성에게는 시를 쓸 수 있는 눈곱만 한 기회도 없었던 것입니다.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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