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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책 | 폴 오스터문학 2012. 1. 1. 21:49
환상의책 카테고리 지은이 상세보기
오랜만에 소설을 읽습니다. 폴 오스터의 <환상의 책>. 폴 아저씨의 높으신 이름과 영화배우 뺨 후릴 듯한 흑백사진은 뵌 지 오래되었지만, 이제야 제대로 그의 이야기를 보게 됩니다. 소설, 다른 문학 장르들을 포함해서 이야기란 건 대단한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오래전 어린이들이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에 푹 빠졌던 때나, 지금 어린이들이 <해리포터>에 빠지는 모습이 이야기의 힘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듯합니다.
폴 아저씨의 이 책은 바로, '이야기'와 '사람'에 대한 내용입니다. 사람의 삶 속에서 이야기가 어떤 힘을 발휘하고, 인생을 어떻게 바꾸는 지 그려놓은 이야기입니다.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
가까운 사람을 마음에 묻는 일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도 드뭅니다. 그 사람이 가족이었거나, 사랑하던 사람이었다면 더더욱 말로 하기 어렵겠지요. 폴 아저씨가 꾸며낸 이 책의 화자(데이비드 짐머 교수)는 그런 경험을 합니다. 아내와 두 아들을 비행기 사고로 한 순간에 잃고 말지요. 현실감이 떨어진다-고 하면 느낌이 올까요? 보통,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하기 어렵지만, 그런 경험을 하는 것 역시 보통 사람들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현실감 떨어지는 큰 사건을 겪으며 현실에서 튕겨 나오게 되지요.
가족들의 죽음으로 막대한 보험료가 수중에 들어오지만, 짐머 교수의 삶은 점점 현실에서 멀어져 가게 됩니다. 돈에 얽혀버린 아내와 아들의 죽음의 기억은 오히려 마음을 괴롭히지요.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은 살아갈 사람의 마음 속에 새겨져서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랑과 사람이 자리를 채우더라도 마음 속에 새겨진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겹쳐지지도 않습니다.
환상의 책, 어쩌면 현실의 책
이 책의 제목인 <환생의 책>은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책들과 이야기와 영화에 대한 제목입니다. 주제이기도 하고요. 이야기 초반에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하는 궁금증이 계속 맴돌다가 책장의 절반을 넘기면서 보르헤스가 떠올랐습니다. 같은 구조, 비슷한 내용의 순환반복 되는 이야기. 서로 마주보고 있는 거울 속의 존재처럼 끝없이 반복되지만, 완전히 동일하지 않는 이야기.
데이비드 짐머 교수가 번역하는 책 중에 샤토브리앙 <죽은 남자의 회상>이란 책이 등장합니다. (샤토브리앙과 그의 책이 존재한다는 건 확인했지만, 우리나라에 번역이 되어있는 지는 확인 못했습니다.) '환상의 책'은 바로 샤토브리앙의 그 책부터 시작되는 것 같았지요. 샤토브리앙이 쓴 자서전이 <죽은 남자의 회상>이라고 합니다. 그 책은 그가 죽은 뒤에 출판하도록 되었다고 얘기하지요.
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헥터 만이라는 영화배우. 이 사람은 폴 아저씨가 창작한 사람같은데, 그 역시 자신의 삶을 기록한 자서전을 한 여자를 통해서 쓰게 됩니다. 그 역시 자서전은 그의 사후에 출판되기를 원하지요.
자신의 삶을 대외적으로 공개하는 건 보통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닙니다. 보통 사람들은 살면서 한두 가지의 실수와 잘못을 한다지만, 그 실수가 세상에 알려지면 정말 심각한 사태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요즘 인터넷이, 네티즌 사설 탐정들이 그 효과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지요.
샤토브리앙의 기억은 짐머 교수의 번역으로 다시 기록되어 살아남았고, 핵터 만의 기억은 불에 타 사라집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에 관련되는 사람들에 의해서 생명력을 얻기도 하고, 소멸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정신없이 엮이며 진행되는 이야기는 짐머 교수 한 사람의 삶 속에 녹아들어 갑니다. 한 개인의 삶에 죽은 사람의 기억이 녹아들고, 먼 과거와 가까운 과거에 살았던 사람의 기억이 함께 녹아들며 앙금을 만들게 됩니다.
이 책의 흐름은 기억의 앙금들이 짐머 교수의 삶을 현실로 다시 돌려 놓는 것으로 접어듭니다. 역시, 보통 사람에게 찾아드는 급격한 사건-심장발작-으로 짐머 교수는 그의 숨겨두었던 이야기(환상의 책)를 쓰게 됩니다. 샤토브리앙의 전례를 따라서 '사후출판'으로.
400쪽 조금 넘는 이 책에서 개인의 삶이 평범한 흐름을 따라가다 급류를 만나 현실에서 튕겨져 나가고, 우연한 계기가 보통의 삶에서 만나지도 못했을 법한 세계로 자신을 이끌다가 결국에 바다로 이르듯 도도하게 흘러가는 삶을 봅니다. 누구나 자신만의 <환상의 책>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 자신의 삶이 '환상의 책'이기도 하고 '현실의 책'이기도 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어쩌면 며칠이나 몇 시간 뒤에 우연한 사건을 통해서 급류에 휩쓸리는 삶을 살 수도 있겠지요. 폴 아저씨가 이야기를 맺으며 적은 글귀와 책의 서두에 적은 글귀처럼요. 꽤 흥미로운 소설입니다.
그것들은 단지 실종된 것일 뿐이고 조만간 어떤 사람이 우연히 앨머가 그 필름들을 숨겨 놓았던 방문을 열 것이고 그 이야기는 맨 처음부터 다시 시작될 것이다. (p.416)
인간은 하나의 동일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끝에서 끝까지 이르는 여러 다른 삶을 살며 그것이 바로 비극의 원인이다. -샤토브리앙 <죽은 남자의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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