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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판정신 함양과 인간해방의 교육
    無序錄 2011. 12. 27. 19:03

      오래전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육’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공헌해 왔다. 교육에 대한 정의는 상당히 다양하며, 그 합의점을 도출하기도 매우 어렵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교육을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위해 가져야할 중요한 권리라고 동의한다―이 부분에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사람들은 무리를 이루고 살게 되면서, 세계(타인)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제도·법을 발명했다. 제도와 법에 의해 다스려지는 사회가 성립되면서 많은 이로움과 함께 해로움이 나타나게 되었다. 사회는 새로운 세대를 교육하려고 하며, 그들이 교육되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요구하는 교육의 내용이 과연 무엇을 위한 인간을 길러내는 것인지는 깊이 생각해 볼 문제가 된다. 사회학자는 그것을 ‘사회화’라는 용어로 지칭하고, 인류학자는 ‘문화화’라고 가리킨다. 이것과 관련된 문제의 가장 큰 원인은 구조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는 사람들의 합의에 의해 구성되었다. 그러나 사회가 구조를 이루고 유기적인 것이 되자, 그 생명을 영구적으로 지속시키기 위해서, 구성원을 보충하려 하게 되었다. 이것은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계획한 것도 아니며, 사회구조가 확장됨에 따라 내부에서 자라난 것이다. 그 같은 이유로, 사회구조의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 구조를 지탱하기 위한 교육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교육은 기득권자들이 혹은 구조가 의도를 가지고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공적(公的)인 개인들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구조의 허점이라 할 수 있다.
     

      공적인 인간으로서 합의한 제도는, 각 개인에 앞서 혹은 우위에 존재하면서 그 사회에 속한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는 족쇄로 기능한다. 자신들의 권익과 생명을 지키고자 만들었던 제도는 사람들이 공적·사적 책임을 제도에 거의 전적으로 이양하면서 비대해졌고,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그리고 제도에 책임을 전가함과 동시에 자유도 제도에 의해 구속되는 것을 희망했고, 구조에 기대어 살기를 원하게 되었다. 극도로 확대된 제도는 그것의 정점에 있는 권력의 무기로서 억압자들의[각주:1] 이데올로기를 담게 되었다. 칸트는 권력(자)을 가리켜 ‘후견인’이라는 고상한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그것은 곧 구조자체 그리고, 그 구조를 생산한 더 큰 범주의 ‘문화’로 규정해 볼 수 있다.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생활양식과 합의된 규범 등이 역사적 산물로서 굳어진 것을 문화라고 했을 때, 그것은 사람들의 신념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오랜 세월을 거쳐서 만들어온 합의된 규범과 정치적 관계, 생활양식, 정신구조 등이 포괄적으로 ‘융합’되어 있는 거대한 하나의 총체로서의 ‘환경’을 문화라고 지칭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문화라는 토양에서 자라나는 싹이 바로 ‘신념’이다.
     

      사람들은 신념에 의해서 세계를 판단하고 인식하며 가치를 판단한다. 그리고 그렇게 작용하는 신념은 자신에 의해서 결정되고, 형성된 것으로 믿지만, 사실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분명, 문화에서 배출된 것이다. ‘나는 나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망명한다’라는 문장은, 이 글에서 논의하는 바에 의하면, 한 번쯤 검토할 필요가 있다. ‘나의 정치적 신념’이란 무엇인가. ‘정치적 신념’이란 기존에 있었던 여러 갈래의 정치적 입장과 문화 속에서 특정한 하나가 ‘선택되어진’ 것이다. 자신이 능동적으로 책임이 있는 자유를 통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성장배경과 살아 온 과정, 그가 속한 시대적 맥락에 의해 ‘주어진 척도’인 것이다. 이와 같이 문화는 그 안에 속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파악(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또한, 문화는 이율배반적 입장을 견지하는 자들에 의해서 두 부류로 구분된다. 상위문화와 하위문화가 그것이다. 사회를 지배하는 소수자의 상위문화는 학교라는 ‘사회적으로 합의된’ 기관을 통해서 그들의 문화를 강제하고 있다. 그 사회적 합의에 의한 학교는 구조의 하부에 위치하는, 하위문화에 속하는 이들의 입장은 제외한 합의된 기관이다. 그러나 그러한 문화적 폭력은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모를 만큼 ‘은밀하고 깊숙이’ 담겨 있다.
     

      문화를 인간 정신 산물의 총체라고 할 때, ‘언어’를 인간 정신 활동의 중요한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사고를 무한히 확장할 수 있다. 인간 정신 활동의 하나의 총체적인 결과물로서 나타난 것이 문화라고 하면, 결국 언어를 수단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그 문화에 대한 문제점도 언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의 흐름을 따라 문화적 폭력의 증거로 ‘언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상위문화의 언어는 하위문화의 언어보다 ‘전문화’된 언어다. 상위문화의 언어는 분명, 하위문화의 언어에 비해 고도로 상징화 된 용어의 사용이 많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하위문화의 언어가 아닌 상위문화의 언어로 지배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공적인 개인의 입장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 내용을 설명하는 교사들은 지배층보다는 하위문화에 비교적 가까운 언어로 설명하지만, 그것 역시 하위문화에 속한 학생이나, 상징적 언어를 파악하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관념의 게임’을 주문함으로써 폭력을 행사한다. 그 결과로 게임 규칙을 이해하지 못한 학생들은 좌절을 경험하고, 이해한 학생들―대부분 상위문화에 속하는-은 그 언어를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둘째, 상위문화의 언어는 하위문화의 언어보다 복잡한 문법 체계를 갖는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구조를 지배하는 문화는 정치력을 집중해서, 그들의 신념에 따라 ‘선(善)’[각주:2]이라고 믿고 있는 그들의 문화를, 하위문화에 기대어 있는 개인에게 전수해서 ‘더 나은 삶’으로 이끌려고 한다. 하지만 전수하는 과정에서 상위문화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함께 가져온다.
     

      하나의 예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의사소통의 수단, 즉 언어의 문법구조를 들 수 있다. 이미 상위구조에 어느 정도 편입에 성공한 교사는 매우 체계적으로 조직화된 문법 언어로 가르친다. 그러나 하위구조에 속한 학생들이 보유한 문법 능력으로는 교사의 언어를 ‘해석’할 수 없다. 그 부분에서 서로 합의된 것을 추구하지만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보유한 상위구조의 하위구조에 대한 폭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만일, 하위문화에 있는 개인들이 상위문화에 있는 언어 구조를 파악하게 된다면, 그들이 합의한 위치의 부당함과 문화의 모순점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타나는 문제의 중요한 점은 가르치려는 교사와 배우려는 학생이 서로가 서로의 언어 구조가 다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와 같은 과정으로 학생으로서 개인은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 갈 시기에 언어의 구조적 폭력에 의해 지배자들의 신념을 검토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한 채, 이해가 아닌 단순 주입에 의한 교육―일종의 언어폭력―이 자행된다.
     

      셋째, 문자언어는 그것 자체로 권력을 갖는다. 지배자들의 ‘교양 있는’ 언어로 논리가 문자화된 언어로 표현된다. 대체로 상위문화의 의사소통 방식은 문자언어가 주를 이루고 있다. 문자언어는 그 문자 언어를 이루고 있는 구조화된 문법 지식이 있는 사람만이 그 텍스트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한다. 피지배자들은 그 문자가 어떤 시니피에(signifié)[각주:3]와 결합되어 있는 시니피앙(signifiant)인지 ‘짐작’한다.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이해 자체를 바라지 않고, 지배층이 바라는 의도를 자신의 의도로 착각하고 충실히 따른다. 그리고 그 의도에 따른 자에게 지배자(=구조)는 포상하며, 지배구조에 편입할 수 있는 극소수의 기회를 부여한다. 그러한 내용과 구조는 문자 언어를 통해 견고화 된다.
     

      지배층이 사용하는 단어에는 그들의―지배구조의 입장에서의―선(善)이 숨겨진 채 강요된다. 교육 내용에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합리적, 논리적, 유기적’과 같은 단어는 그 자체로 학생들에게 ‘막연히 옳음’을 주입한다. 단어의 쓰임은 그것 자체가 옳고, 좋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언어 구조와 상징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은 ‘그런가보다’라는 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의 문제점은 사회를 지배하게 된 구조에 있다. 그러나 이것을 전적으로 사회구조의 문제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인간은 누구나 ‘보다 나은 것’을 지향한다. 비판정신이 결여된 상태의 본능적인 경향은 학생이 현재 속해있는 구조 안에서 보다 나은 것, 즉 상위구조의 구성원이 되기를 원하게 한다. 학생 스스로도 성공적으로 상위구조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사회구성원의 선발기능을 맡고 있는 교육구조 안에서 지배문화 및 구조를 스스로 합의하고 훈련받기를 원한 것이다. 때문에, 전체 사회구조의 하위 구조로서 기능하는 교육구조는 상위구조의 체계를 학생들의 교육에 적용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타나고 있는 일련의 문제들은 사회구조와 구성원 공동의 문제이자 책임이라는 판단이 가능하게 된다.
     

      이런 문제는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다. 지극히 역사적인 개념으로 파악해야 한다. 역사적 사실을 통해, 구조 자체가 지배하는 세계의 보편적인 경향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근대적 구조’의 선(善)은 효율성이다. 그것은 15세기 초에 근대의 문을 열었던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를 거치며 나타난 상업혁명을 계기로 크게 부각되었다. 그 후로 상업의 선(善), 다시 말해 경제·경영구조가 전체 구조 속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6세기가 지난 오늘에는 경제구조의 선(善)이 전체 구조를 뒤덮게 되었다.
     

      위와 같은 논리가 하위구조에 해당되는 교육구조에도 적용되었다. 기본적으로 교육구조 내부에는 ‘전인교육’[각주:4]이라는 선(善)이 있었기 때문에, 효율성이 홀로 최우선의 선(善)이 되지 못했지만, 기존의 선(善)과 갈등하게 되었다. 그 증거로 우리나라 제7차 교육과정의 목표를 들 수 있다. ‘세계를 주도하는 경쟁력 있는 인간을 효과적으로 양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 목표는 제6차 교육과정의 목표[각주:5]에 비해 교육구조 내부의 선(善)의 위상이 격하 된 것으로 파악된다.
     

      상위(지배)구조는 선대(先代)에서 이미 구조적으로 선(善)이라고 정해 둔 것을 그대로 답습하려는 습성이 있다. 구조에 담겨 ‘사회적’으로 굳어진 유물과 같은 성격의 선(善)은, 지속적으로 강화되어 내려오게 되면서, 절대 진리처럼 여기게 된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그 선(善)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고, ‘막연히 옳음’을 주입하고 주입 당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러한 경향성은 인간의 심리적인 측면에 있다. 먼저, 인간은 익숙한 것―문화적 환경―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한다. 뉴욕에서 나고 성장한 사람이 어느 순간 아프리카 정글에 홀로 있을 때를 생각할 수 있다. 반대로, 인간은 구조에 의해서 소외―꺼려짐을 받게―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 구조는 자신이 속한 작은 구조로부터, 범세계적 구조까지 해당된다. 이와 같은 두려움에 대한 방어기제로 익숙한 것에, 자신이 속한 구조에 매달리게 된다.
     

      그 기제는 인간이 구성하고 있는 구조도 같은 원리로 작동한다. 하나의 작은 구조는 그것 보다 상위구조의 요구와 선(善)을 충실히 따르게 된다. 그리고 상위구조는 다시 더 큰 구조의 요구에 부응하려 노력한다. 그 기제가 ‘선(善)’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하지 못한 채, 국가적 차원의 구조에서 범세계적 차원의 구조에 부응하기 위한 노력이 다음과 같은 결과로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구조가 세계를 지배하게 되면서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나타난 부작용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온 국민이 언어폭력을 당하고, 지배자의 신념을 자신의 것으로 오해한 독일의 나치즘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이 대표적[각주:6]이다. 독일, 독일국민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과 함께 범세계적 구조에서 철저히 소외당하게 되었다. 독일이라는 국가구조의 정점에 있는 지배자의 뛰어난 언변으로 포장한 신념은 독일국민의 방어기제를 자극했고, 그들은 스스로 족쇄를 채웠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구조의 확장인, 국가라는 구조가 세계구조에서 소외되어 있음을 두려워하고, 다시 ‘효율적’으로 구조에 편입하기를 원한 결과,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반납하고, 완전히 구조의 일부가 됐다. 그러나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지만, 그것이 배의 존재 이유는 아니다. 당시 독일국민들은 ‘독일’이라는 항구에 서로 자신의 배를 정박하려고 했다.
     

      사회가 가장 효율적인 것을 지향하며 진화한 결과, 구조자체가 목적이 되고 구조가 사람을 지배하게 되는 방향으로 치닫게 되었다. 효율성은 ‘구조의 시대’를 지배하는 ‘선(善)’으로 군림하게 되었으며, 구조에 속한 모든 구성원은 그 가치를 진리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러한 극단적 상황―독일의 나치즘, 이탈리아 파시즘 등―이 바로, 구성원들이 ‘선(善)’을 무비판적으로[각주:7] 있게 된다.
     

      ‘허상’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학교와 교사의 역할이 중요하다. 먼저 학교와 교사는 솔직해져야 한다. 학교는 스스로 전체 구조적 관계에서 다른 구조에게 반(半)예속적인 상태에 있다는 것을 선언해야 한다. 예컨대 현재 학교는 경제·경영(효율성) 구조에 속한 예속적 관계임을 학생들에게 알려줌으로써 구조의 한계를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교사는 상위구조와 하위구조의 관계와 그 관계의 성격을 학생들에게 제시하고, 학생들이 거의 고착화 되어버린 거대한 구조에 진입하게 될 미래의 구성원이라는 것을 알려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 능력의 자유와 책임을 구조에 맡기고 있을 뿐이다. 인간, 학생이 속한 구조의 한계와 위치, 다른 구조와의 관계를 알려야 한다. 그리고 미래의 구성원은 새로운 합의에 의해서, 굳어가고 있는 구조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일러줘야 한다.
     

      사회구조 안에서 지배구조의 입장과 피지배구조의 입장이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곳은 오직 학교뿐이다. 그러나 그 학교에서조차 학교와 교사의 편견 또는 선입견 때문에 동등한 교육이 되지 않고 있다. 지배구조 출신 아이들의 문법적인 언어가 교사의 언어와 일치하고, 피지배구조 출신 아이들의 문법에 맞지 않는 언어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한 쪽은 우등하고, 한 쪽은 열등하다고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 선택되어진 문화가 지닌 차이의 증거일 뿐이다. 그러한 ‘차이에 의한 차별’과 같은 구조의 모순을 교사가 먼저,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에서 벗어나 솔직하게 알려줌으로써 지금까지 옳다고 여겨왔던 것이 허상이었음을 학생이 스스로 깨닫게 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은 곧 구조의 극복을 위한 실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은 작업을 통해서 학생들은 막연하게 ‘그런가보다’했던 구조를, 그려 볼 수 있게 된다. 그럼으로써 지금까지 구조에 속한 개인들이 스스로 행동하고 사고할 수 있는 자유와 책임을 포기하고 있었음을 깨닫기 시작할 것이다. 그와 같은 비판정신 함양의 기초 작업을 통해서 자신 스스로 가치 척도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 수 있다. 그렇게 한 뒤에 자신이 속하게 될 구조의 문제점을 찾아내고 비판할 수 있으며, 구조에 속해 있되 구조에 물들지 않는 개인이 될 수 있고, 해방된 인간이 될 수 있다.
     

      사회구조를 인식하고 그것으로부터 낯설게 함으로써, 잃었던 자신을 점차 자기의 모습으로 찾아가는 그것이 바로 인간해방교육의 목적이 될 수 있다. 그 목적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교육은 사회에서 인정하지 않는 비정규교육으로서 또는, 비판정신으로 무장한 소수의 지식인들에 의해 세워진 학교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그 규모나 사회구조 전체의 극히 일부라는 한계가 있다.
     

      지금의 국가적 차원에서 조직된 교육구조는 비판정신을 죽이는 독약과 같다. 현재의 선(善)인 효율성을 정점으로 하는 구조에서 하위 구조를 차지하고 있는 교육구조를 봤을 때, 개인들의 저항과 비판은 선(善)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구조 내부에서는 전인교육을 지향하지만, 모든 학생들은 자신을 억누르는 대학입시―국가구조―에 ‘목적’을 두고 초·중·고 12년을 효율적으로 버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교육적으로 완전한 인간은 능동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로운 정신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이렇게 목표와 내용이 서로 거리가 있는 교육내용은 곧, 학생들에게는 목적―효율성과 전인성―이 불분명한, 방향을 상실한 교육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방향성을 상실한 목적의 교육내용은 학생들이 진정한 교육―자유와 책임을 겸비한 정신의 함양―에 접근하는 것을 두렵게 하며, 본능―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에 이끌려 그들(구조)이 부여한 주어진 임무에 충실히 길들여지게 한다. 그렇게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희망과 자유라는 배를 구조라는 항구에 묶어둔다. 학교가 지향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솔직한 선서’를 통해 학생이 지금 속한 세계의 맥락을 읽을 수 있는 연습의 장을 마련해 줄 필요가 있다.
     

      지배구조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다. 한 사람이 지배 구조에 편입되면 그는 그보다 높이 위치하는 구조에 의해 자유를 빼앗기고, 구조에 철저히 훈련된다. 그 구조에 적응해 갈수록 그는 중간정도 권력의 구조 속에 위치하게 될 것이고, 이번에는 반대로 그가 지배자의 위치의 공적인 개인으로 아래 구조에 속한 이들을 대상으로 억압을 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본연의 자신의 모습이, 공적인 사회인으로서의 자신에 의해서 억압되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이런 구조는 그 지배·피지배의 관계를 떠나서 구조 안에 있는 모든 개인에게 족쇄가 되어 ‘구조자체’가 척도가 되어 버린다.
     

      우리는 각자 만물의 척도가 되어야 한다. 고대 소피스트의 이 테제는 오늘도 유효하다. 자신의 정신적 자유를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 발휘하고, 세계를 대상으로 가치 판단을 하는 기준은 자신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판단을 내리는 개인들의 합의가 이루어지고, 그것에 대한 타당성 검토도 참여한 개인들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억압 구조에 편입해서 그 구조의 일부가 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은, 본연의 자신과는 거리를 더욱 넓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인간해방은 순수 본연의 자신의 모습이 아닌, 외부에 의해 가치 척도가 강요된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가능하다. 자신이 자기의 정신에 대한 지배자가 아니었음을 인식하고, 구조에 무책임하게 떠넘겼던 책임을 되찾음과 동시에 자유를 가져와야 한다. 그것으로부터 정신적 자유와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을 때, 자신이 속한 사회를 ‘거기 있음’으로 인식하고 비판적 시각과 정체성을 탐색할 수 있다. 그 작업이 가능해 진다면, 항구에 정박해 뒀던 배를 출항시키는 작업이 될 것이고, 배 본연의 존재 이유인 넓은 대양을 항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인간해방이며, 인간을 가르침에 있어서 지향할 바이다.


     

    1. 공적인 입장으로서의 개인 [본문으로]
    2. 그것 자체로서 지향해야 할 정당성을 갖는 것 ≒ arete, virtue [본문으로]
    3. 언어학자 Saussure가 제시한 개념이다. 단어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를 소리요소인 signifiant(기표)과 의미요소인 signifié(기의)로 설명했다. 한 단어는 인간내부에 간직된 심리적 소리단위인 signifiant과 그것이 지칭하는 내부의 심리적 의미단위인 signifié가 동전의 양면처럼 밀접하게 결합되어 소리와 의미를 신속하게 환기시키면서 인간의 언어체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를 우리가 ‘별’이라고 한다면, ‘별’이라는 소리(표현, signifiant)에 ★라는 뜻(내용, signifié)이 결합된 기호로 인정된다. 이것은 곧, 인간의 상징할 수 있는 능력의 전제가 된다. <언어와 문화> 전정례, 2002, P11, 23 인용. [본문으로]
    4. 완전한 인간으로서 성숙하게 돕는 교육 [본문으로]
    5. 건강한 사람, 자주적인 사람, 창의적인 사람, 도덕적인 사람을 추구하고 민주시민 공동체의식과 도덕성을 배양하고, 정보화, 국제화, 산업구조 개혁 등의 변화에 창조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며, 교육 운영을 꾀한다. [본문으로]
    6. 1940년대 중반의 일본의 전체주의도 포함시킬 수 있으나, 발생 경위가 독일·이탈리아와는 다르다. [본문으로]
    7. [/footnote] 새로운 세대에게 교육하고, 새로운 구성원으로 보충한 것의 증거가 된다.
       

        학교는 사회구조와 시대 안에서 적합한 ‘구성원’을 ‘바르게’ 이끌어 내고자하는 의도를 갖고 교육한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교육은 위에서 설명한 ‘언어폭력’과 같은 식의 교육이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결국에는 지배 논리구조를 정당화 하는데 이용되며,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학생들이 지배논리를 의심하는 것을 봉쇄하게 되고 만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 교사나 교육과정 연구자의 ‘의식화된 의도―부정적 의미에서의―’는 없다. 그러나 교육구조 자체의 미흡한 부분에 의해서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며, 학교는 수동적 인간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내고, 그들로 하여금 교육구조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조의 새로운 구성원이 되게 한다. 현재 학생에게 드러나지 않은 교육구조는 정치·권력 구조를 교묘히 감춰서 퍼뜨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현재, 구조화 된 구성원으로 인간을 만듦으로써 구조가 인간을 지배하고 있지만, 구조를 ‘선택한 것도 사람이고, 구조를 이루고 있는 연결고리도 사람이다.’ 진리를 검토하고 반성하는 작업이 없이 받아들인 결과의 부작용으로 나타난 문제들은, 구조에 속한 인간이 비판정신을 갖고 있지 못함으로 인해서, ‘선(善)’을 잘못 합의한 것이 원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조의 해체와 재구성을 위한 방안으로서 그 구조를 구성하게 될 새로운 세대를 비판정신으로 무장한 개인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게 된다. 비판정신으로 무장한 개인은 자신의 한계와 가능성을 알고 있기에, 그 개인들의 합의에 의해 재구성되는 구조는 한계와 가능성을 합의해 나갈 수 있다. 그리고 같은 논리를 따르면, 구조는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구성원의 합의로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 가능해진다.
       

        한국 사회에서 정규교육과정을 거친 ‘일반적인’ 사회인들은 자유롭지 않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로운 개인은 구조의 선(善)에 의해 ‘사회에 기대어(묶여) 있기’를 강요당하며, 교육은 사회화 또는 문화화라는 ‘공식적’으로 합의된 포장을 시작한다. 현재 한국의 학교는 근대 시민 양성기관으로서 충실한 역할을 하고 있다. ‘세계를 주도하는 경쟁력 있는 인간을 효과적으로 양성’하려는 목표를 지향하고 있는 곳이 곧 학교다. 학교는 근대화 이후, 교육을 대표하는 조직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오늘의 학교교육은 도덕적인 것과 사회구조의 밝은 부분만 가르치고 있다. 반면에 어두운 부분에 관한 내용은 극히 드물다. 앞서 언급한 어휘의 사용과 그것이 가리키는 내용에도 문제가 있다. 20세기 후반 한국에서 학교 교육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은 민주주의는 좋고 사회주의는 나쁘다고 생각하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거의 같은 것으로 인식한다. 그 이유는 존재 위협을 받고 있던 한국의 사회구조가, 20세기 당시를 지배하고 있던 한편의 거대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라는 구조에 편입되었고, 그 구조에 의해서 ‘구원’ 받았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구성원’은 비판정신을 갖지 못한 채 ‘도움을 준 구조’를 ‘선(善)’으로 인식했다.
       

        그 결과 20세기 한국의 교육은 시대적·이데올로기적 맥락을 한 편의 입장에서만 주입했다. 한 쪽의 정보만을 주입하는 교육 방법과 내용을 통해서는 비판적 사고를 기를 수 없다. 지금까지 교육을 통해 주입된 지식은, 속한 구조 안에서는 모두 진리이고 옳았기 때문이다.
       

        하나의 구조에서 절대적 진리로 통하는 것이, 시간과 공간을 다르게 하면, 거짓이 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반(反)비판적 사고를 가진 사람은 자신이 속한 구조의 진리만을 옳다고 여기고, 사회화 된 사람은 다른 사회의 구조(문화)를 오로지 자신이 갖고 있는 ‘신념’에 비추어 가치를 판단한다. 자신의 신념에 부합하면 좋은 것으로, 그렇지 않다면 미개한 또는 올바르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게 된다. 수천 년이 넘게 지속돼 온, 중동 지역과 유럽 지역의 종교분쟁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과거로부터 지속되어 더욱 강화되어 왔다. 자신 주변의 다양한 세계와 구조를 이루고 있는 많은 요소들이 ‘있는 현실’을 사실로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비판 정신의 교육을 위한 첫걸음이 될 수 있다. 구조에 동화된 개인의 시선은 큰 틀에 갇혀서 맨 꼭대기를 쳐다보며 환상을 키운다. 교육이라는 구조에 속한 학생과 교육자도 같은 범주 안에 있다. 학생 자신 주변의 세계가 아닌 교육, 즉 ‘그들’에 관한 교육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비판정신이란 사회구조에 대해 자신이 모든 행위의 주체가 되어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바르지 못한 것을 능동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성숙한 정신을 의미한다. 비판정신 함양을 위해서, 교사는 학생들이 처한 세계의 정확한 현실, 밝고 어두운 부분을 모두 드러내 줘야 한다.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안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제를 학생이 스스로 얘기할 때, 세계를 낯설게 인식할 수 있다. 지금까지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고 있던 것이 허상이었음을 앎으로써, 구조에 속해있지만 구조를 객체화해서 바라볼 수[footnote]비판정신의 실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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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oem_정원사_책들이 있는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