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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형외과에서 프로크루스테스를 만나다.
    無序錄 2011. 12. 31. 14:44

     

      으헛. 내 허리. 진작에 갈 것을 때늦은 후회다. 다들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늦었음을 깨닫는 순간이라도 좋으니 시작하라고. 나도 오늘부터 시작이다. 늦은 아침에 도착한 문자는, 육군 학사장교 1차 통과를 알리며 11월 7일까지 국군병원으로 나와 신검을 받으란다. 휴. 숨을 고르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병원 가 봐야지."

     

      병원은 생각보다 멀지 않았고, 10년이나 된 내 자전거에 올라 쌩 달렸다. 금세 도착. 요시다 슈이치의 <일요일들>을 가지고 갔다. 그닥 예쁘지 않은 간호사 누나에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의료보험증을 제출하고, 접수 완료. 굳이 아름다운 미소까지 드릴 필요까지는 없어도 되리라 깨달았지만, 병원에 너무나도 오랜만이라 나타난 방어기제였다.

     

      의자에 앉아 <일요일들>을 눈으로 후르륵 마셔버리던 중에, "이XX 님, 들어오세요" 경상도 억양이 섞인 서울말이 들려온다. 애써 서울말 쓰지 않으셔도 괜찮을텐데─라고 투덜거리며 잽싸게 책을 가방에 쑤셔 넣고 들어섰다.

     

      "어디가 아프세요?"

      "꼬리뼈 근처로 해서, 앉으나 서나 뜨끔뜨끔합니다."

      "다리가 저리거나 하는 일은 없나요?"

      "윗몸일으키기를 하고 나면, 허벅지 쪽이 저릿저릿합니다."

      "일단 X-ray를 찍고 봅시다."

      "예에."

     

      그대로 잠시 대기실로 걸어갔다. 주변을 둘러보고 고민에 빠졌다. '우리나라는 허리가 너무 안좋은데. 젊은 애들이 정형외과에 이렇게나 많다니...' 다시 <일요일들>을 펴 읽었다. 와세다대를 졸업한 파칭코 알바생 이야기에 빠져있을 즘, 또 다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 "네".

     

      핵폐기물 마크가 선명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잡다한 상식이 쏟아지는 폭포처럼 머릿속을 강타했다. '방사선이지, 참. 이거 많이 쬐면 백혈병에 걸릴 위험도 있는데. 머리도 나빠지려나? 퀴리 아줌마도 방사선 때문에 죽었다지. 언제봐도 저 핵폐기물 표시는 기분이 섬뜩하단 말이야. 북핵 때문에 분위기 살벌한 요즘에 군에 가면 엄청 힘들텐데. 아이고 내 허리야. 사진을 몇 번이나 찍을까. 어떻게 찍으려는 건지, 10년 전 폐렴을 의심하던 의사 아저씨가 찍자고 했던 X-ray가 마지막이었는데……'

     

    "바지춤 끌르고, 이리 누우세요."

     

      마르지 않는 수원(水源)같았던 생각이 갑자기 멈췄다. "예"라는 대답과 함께, 24K 금목걸이를 하고 있는 남자 간호사의 비위에 잘 맞아야겠다 싶어, 재빨리 누웠다. 바로 누워서 한 방. 옆으로 누워서 한 방. 무릎을 구부리고 한 방. 모두 세 번의 촬영이 있었다. 나는 속으로 V를 그리며, 잘 나오기를 바랐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다시 대기실로 나갔다. 역시, <일요일들>을 펼치면서.

     

      세 쪽도 읽지 않았는데, 또 나를 부른다. 나는 대답 잘하는 청년. "예"하고 경상도 억양 서울말 쓰는 의사 아저씨를 보러 간다.

     

      "여기 보세요. 꼬리뼈 근처에 있는 척추 사이 보이지요? 이게 디스크인데, 막, 짓눌렸네요. 수술까지는 안해도, 물리치료하고 약 먹고 하면 나을 수 있습니다."

      "아, 예 그랬구나. 알겠습니다."

      "저쪽 침대에 엎드려 보세요."

      나는 의사 아저씨의 말도 참 잘듣는 청년. "예"

      "조금 따끔 합니다"라고 하면서, 꼬리뼈 부근과 척추 부근에 네 방의 침을 놓는다. 그런데 왜. 입으로 효과음까지 내면서 침을 놓으시는가.

     

      "갑니다, 둘셋 따끔." "으읏"

    "또 갑니다, 둘셋 따끔." "읏"

      "한 번 더, 둘셋 따금." "……"

    "이제 마지막, 둘셋 따끔." '움찔'

     

      "올라가서 물리치료 받으시고, 내일 또 오세요."

      "예."

      이건 개그도 아니고, 리얼 버라이어티 쇼도 아니다. 따끔. 입으로 낸 효과음은 무슨 뜻이었을까. 어쨌든, 뜨뜻한 전동 침대 위에 핫팩을 깔고 누워 한참을 마사지 받았다. 전동 침대의 마사지가 끝날 즘엔, 전기치료기─저주파의 그것 같은─로 '징~징~'했다. 그리고는 마지막.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내 숨통과 골반뼈를 각각 동여 매더니 한참을 잡아 당겼다. '지~잉~. 지~잉~.' 머릿속으로 폭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거 뭐였더라, 누구였더라. 그리스 신화 사람인데. 신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흠. 나쁜 놈이었는데 이 놈도 침대에 누워서 죽었지. 영웅한테. 아, 그 영웅이 누구였더라. 가만. 맞다, 테세우스. 그래, 맞아 테세우스였지. 테세우스가 길을 가다가 도둑을 만나게 되는데……. 프, 프 뭐시기였더라. 이름이…… 꽤 그로테스크한 취향만큼이나, 이름도 그로테스크했는데. 프로메테우스! 는 아니지. 흠~ 아, 그래 프로크루스테스였지. 흘흘~ 생각났구나 얼쑤~. 그런데 나는 테세우스는 아닌갑다. 이걸 당하고 있을 테세우스가 아닌데. 나는 또 착한 양처럼 가만히 누워있네. 아우 갑갑해…….'

     

    띠리띠리~띠리띠리~

     

      생각을 끊어버리는 건, 언제나 소리다. 소리. 그게 관건이다. 오늘의 치료가 끝났다. 자전거를 타고 집에 돌아가며 한탄에 한탄. 진작에 좀 올 것을. 아이구 허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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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oem_정원사_책들이 있는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