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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불평등 기원론 | 장 자크 루소비문학 2012. 12. 24. 23:28
기대는 언제나 흥분을 동반한다. 『에밀』을 사다 놓고, 화장실에서만 조금씩 읽었더니 일 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제자리다. 한길사에서 나온 그레이트 북 시리즈. 상당한 두께의 중압감은 화장실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번에 나의 뇌리에 꽂힌 책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었다. 이 책은 데이트 도중, 여자친구와 함께 갔던 서점에서 20% 세일이라는 지름신 덕에 서슴없이 집어 든 것이다. 언제나 책세상 문고의 얇은 책은, 나름 꽤 무거운 얘기를 나름 꽤 적절하게 풀어냈다. 그러한 기대로 집어 들었고, 결론은 성공. 같이 간택되었던 마선생과 엥선생의 <공산당 선언> 성공을 이은, 멀티히트였다.
책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일곱 줄의 간략한 설명은, 인자하게 웃고 있는 루선생을 숨쉬게 만들었고, 내 심장을 뛰게 했다.
인간은 본래 누구나 평등하게 태어났으나
역사의 어느 순간부터 불평등해졌다.
오! 루선생은 이 가난한 두뇌를 갖고 있는 중생을 위하여, 대신 생각하기를 귀찮다 하지 않으시었다. 논문 현상 공모라는 것은 참 흥미롭다. 열혈 청년이라면, 한 번 정도는 도전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나처럼 입만 나불대는 위인들은 위험할 것이지만. 지식인 사회는 한 번 진입하기가 어렵지,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하면 그 유명세는 떨구기 힘들다. 좋은 측면에서든, 곤란한 측면에서든.
루소도 벼락 출세인이었다. 디종 아카데미의 논문 현상 공모에 응해서, <학예론>이라는 논문―학문이라든가, 예술 같은 게 인간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요지―을 발표해서 수상했고, 그 한 편의 글로 유명 지식인으로 거듭난다.
각설. 루소의 이야기는 재밌다. 상상력이 필요하다. 어떤 현상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지식인 사회에서 무시당하지 않는다던 선생님의 말이 생각난다. 루소의 이번 글은 논리적이다. 추론과 가정, 그리고 거기서 이끌고 있는 결과들은 논리적으로 부담 없다. 그러나 당시 18세기의 계몽주의 학자들과 대립했을 루선생을 떠올리면, 입맛이 쌉쌀해 온다.
인간 사회를 침착하고 냉정한 눈으로 고찰하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강자의 폭력과 약자의 억압 상태만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던 루선생. 이 말. 어디서 많이 봤다. 마-촘선생 두 라인의 선배격이다. 살아있는 비판이 이 두껍지 않은 책자에 담겨있었다.
루소의 논문[1]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었고, 제네바 공화국에 바치는 헌사와 머리말이 그 앞을 차지하고 있었다. 1부에서는 자연법에 대한 고찰을 하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 역사―기록된 역사 이전, 先史―를 짚어서 태초의 인간을 상정한다. 굳이 “나는 자연인”이라 외칠 필요도 없고, 외치는 그것이 비정상인 상태를 이끌어낸다. 1부의 내용은 70%가 소설이고, 30%는 루선생의 논리적 설득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백하건대, 난 넘어갔다.
2부의 내용은, 1부에서 작업한 결과를 잇고 있다. 1부를 통해 이미 ‘넘어간’ 독자를 향해, 행복했던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이 어찌하여 불평등해지고, 갈수록 불행해지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루선생의 이야기는 논리적이다. 만일, 이 책을 읽는 사람이 순자 신봉자이거나, 홉스 추종자라면 질겅질겅 씹어먹을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나처럼 맹자나 노자쟁이라면, 독자의 고개는 중력과 양력을 이기지 못할 테다.
태초의 인간. 그들은 ‘동수’랑 논다. 그러나 자연법에 의하면, 그런 인간은 참 나약하다. 위협을 피해 공동체를 구성하고 그 속에서 타인을 의식하며, 인정 받기를 원한다. 힘이 세거나, 지혜롭거나, 말을 잘 한다거나. 그러나 모든 인간은 본래 ‘동수’랑 놀기를 좋아한다. 인간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존중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건 말로만 진실. 현실은 자연이 부여한 차이에 의해 어쩔 수 없다. 힘이 세거나, 지혜롭거나, 말 잘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없는 것이고. 강자와 약자는 갈라지게 되었다―이런 구도를 갖고 당시 18세기까지 주~욱 이어져 온다.
2부의 결론은 재밌다. 루소는 단순히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친 인간이 아니다. 프랑스 시민혁명의 정신적 지주가 되기도 했고, 나에겐 마선생의 선배로 읽혔다. 루선생은 불평등의 진행 단계를 세 가지 단계로 구분했다. 1단계는 법과 소유권 설정, 2단계는 행정 권력의 제도화, 3단계는 합법적인 권력에서 독단적인 권력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얘기했다. 이 얘기를 눈에 보이는 권력에서, 권력을 조종하는 현대의 권력―거대자본기업―으로 대치하면 들어맞는다.
고전은 시대에 따라 재해석될 가능성이 언제나 열려있다. 그렇기에 古典이라는 것이리라. 마지막 부분을 옮겨 적으며, 루소 찬사를 마친다.
자연법을 어떻게 규정하든, 어린애가 노인에게 명령하고 바보가 현명한 사람을 이끌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마저 갖추지 못하는 판국인데 한줌의 사람들에게서는 사치품이 넘쳐난다는 것은 명백히 자연의 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2]
[1] 이 논문 역시, 디종 아카데미의 논문 현상공모에 응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인간 사이의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 불평등은 자연법에 의해 허용되는가?”-디종 아카데미의 질문. 책 pp.43.
[2] 책 p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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