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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고 사는 일은 전혀 알 수 없다. 어제는 아내 퇴근길에 같이 장을 보고 돌아왔는데, 함께 얘기를 하다가 직장 동료의 집안 내력에 대해 말이 나왔다. 그 집 어른들 중에는 뇌졸중으로 돌아가신 분들이 많았다고 했다. 그런데 최근에 큰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상심하며 있던 차에 어른 중에 또 한 분이 뇌졸중으로 돌아가셔서 같은 장례식장 위-아래층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얘기를 했다. 아내와 함께 탄식을 하며, '인생 한순간이구나'를 연방 내뱉었다.그러다 오늘, 가사 작품을 읽다가 <규원가(閨怨歌)>에 문득 눈에 걸리는 구절이 있었다."우리 님 가신 後는 므슴 弱水 가렷관대, 오거니 가거니 소식조차 그첫는고"가만히 누우면 몸이 둥둥 뜨는 사해(死海)와는 반대로, 약수(弱水)는 부력이 없어서 나뭇잎조차 가라앉는다는 전설 속의 강이다. 다만 죽은 사람들은 약수를 건너 서천세계로 가는데, 한 번 건너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간다고 한다. 그래서 판소리나, 서사무가, 우리 선조들의 타령에는 "약수 삼천리 갔다"라는 말로 그의 죽음이나 소식없음을 표현했다.그런데, 강을 건너는 것과 죽음이 연결된 이미지는 단지 동양에서 그치는 게 아닌 듯하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요단강의 존재도 비슷한 의미가 된다. "요단강을 건넜다"라고 하면 그의 죽음을 가리킨다. 물론, 요단강은 실재하는 강이지만, 물을 건너 천국/이상세계로 간다는 의미가 있다. 그리스 신화를 봐도 죽음의 강이 나온다.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9개의 강. 그것을 대표하는 스틱스 강(Styx, 스튁스)에서도 강을 건넌다는 행위에 죽음이 얽힌다.사람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곳, 공간적으로 끊어져서 이곳과 저곳의 경계를 명확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 강이어서였을까. 옛부터 한 민족의, 국가의 경계는 큰 산이나 강을 경계로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뱃사공의 도움이 없이는 절대 건너갈 수 없는 삶의 경계로서의 강. 그 이미지는 어쩌면, 지구인들의 공통 상징일 수도 있겠다 싶다.다만, 저 세 가지 강의 의미에 강도가 좀 다르게 느껴진다. 먼저, 구약의 출애굽기에 나오는 요르단 강을 건너는 장면. 요단강을 건너면 약속된 땅인 가나안에 도착한다. 고단한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이 끝나고 천국과 같은 세상이 강 건너에 예정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기독교계의 죽음은 그렇게까지 슬프지는 않다. 쉴 수 있는 공간, 이상적인 세계로 여기는 듯하다.그에 비해 스틱스 강은 좀 더 느낌이 피곤하다. 그리스 신화의 스틱스 강은 9개라 좀 많다. 게다가 올림푸스의 신들은 신들끼리 반드시 지켜야 하는 약속을 할 때면, 스틱스 강에 맹세를 했다. 약속을 어기면 신들조차 1년 동안 먹고 마시지 못하고, 따돌림을 당해야 했다. 그래도 동양의 약수(弱水)에 비하면 다행인 점도 있다. 뱃사공에게 돈을 쥐어주면 강을 건네주었다. 이따금 살아있는 사람도 더러 저승에 다녀가기도 했다. 헤라클레스와 오르페우스, 프시케처럼. 이들에게 죽음은 소통의 단절, 고독 때문에 찾아오는 고통에 초점을 둔 것 같다.정말 독한 건 약수(弱水)다. 이 강물은 모든 것을 가라앉힌다. 나뭇잎도, 기러기 깃털도 약수 위에 떨어지면 이내 가라앉고 만다. 봉황 정도는 되어야 깃털을 약수에 씻고, 신선 정도는 되어야 오갈 수 있다. 사람은 절대 이 강을 건널 수도 없고, 건너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런 소식도 주고 받을 수 없어서, 가슴 속에 한(恨)만 켜켜이 쌓이는 느낌이 든다. 가서 보고 돌아온 사람이 없으니, 그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알 수도 없다. 어찌할 방도가 없을 때 감정이 앙금이 되어서 한이 되는 것이 아닐까.그래서 유독 고전 문학에서 보이는 약수(弱水)라는 단어에 한(恨)이 많이 느껴지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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