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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문학 2012. 10. 28. 15:54
롤리타(세계문학전집 30)
- 저자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 출판사
- 민음사 | 2009-01-20 출간
- 카테고리
- 소설
- 책소개
- 어린 소녀를 향한 성적 동경,10대 소녀와 중년의 사랑과 파멸을...
인간들에게 도덕적 감각이란
우리가 덧없는 미적 감각에 지불해야 하는 임무다.
-p.386
책을 읽다보면 씁쓸한 작품이 몇몇 눈에 띈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도 씁쓸한 축에 속한 책이었지만, <롤리타>만큼은 아닌 느낌이다. 롤리타, 롤리타. 그 이름만 불러도 머릿속은 바빠진다. “롤리타”라는 소리(또는 문자)를 들으면 “롤리타 콤플렉스”가 아득한 뇌수 골짜기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뒤이어 “변태, 아동성애욕구, 원조교제”등등 숨쉬기 바쁘게 이미지와 단어들이 솟구친다. 그러나 이런 연상 이미지들은 광고의 선전 문구 같은 거였다.
“미성년자 구입 불가”에 두고 싶지만, “세계문학전집”에 손색없는 작품이다.
#1. 변태 회고록 또는 뮤즈 신 내림
기가 막힌다. 변태들이 좋아할 만한 단어는 “단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단아하고 절절한 느낌의 문장만이 가득하다. 그런데도 그런 문장에서 페로몬이 폴폴 풍긴다. 인터넷 저질 소설과 같이 묶어서 도매 급으로 취급하면 나보코프 옹이 굉장히 섭섭할 거다.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읊조릴 때, 외모를 묘사하는 것보다 훨씬 변태처럼 보이는 묘사 방법이 있었다. 사람에 관련된 숫자를 기억하고 있다는 게 그토록 섬뜩한 일인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님펫은 분명히 지난 7개월 동안 성장했을 터이므로 나는 이 일 월의 치수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엉덩이둘레 29인치(둔부 쏙 들어간 곳 바로 아래). 넓적다리 둘레 17인치, 장딴지 둘레와 목둘레 11인치, 가슴둘레 27, 윗팔둘레 8, 허리 23, 신장 57인치, 몸무게 78파운드, 자세 곧음, 지능지수 121, 맹장은 있음. 하느님 감사합니다. -p.148
‘넓적다리 둘레’를 읽을 즘에는 내가 이 부분을 왜 이토록 집중해서 읽고 있는 걸까―하고 스스로 의심하기도 했다.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다. 1부는 “빨리” 읽히지만, 2부는 “굉장히 더디게” 읽힌다. 1부가 변태 회고록이라면, 2부는 뮤즈 신 내림을 받은 뒤 적어가는 사랑 고백이다. 많은 사람들이 <롤리타>라는 단어에 붙인 느낌은 아마, “변태 회고록”쪽에 무게를 좀 더 둔 듯하다. “기분 나쁜 변태 자식!”이라며 책을 냅다 던지는 쪽에 가까울까. 나처럼 “1부는 후다닥 넘어가는데 2부는 더디네!?”라며 읽어내는 좀 “면역”된 사람도 있을 테고.
목젖을 치고 올라오는 위산을 꿀꺽 삼키면, 좀 더 깊은 곳에 담긴 이야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사랑에 불타오르는 감정을 묘사한 환상적인 문장들도 눈에 들어오면서.
#2. 사랑, 돈으로 살 수 없다
고백하는 중년 남자는 험버트. 꽤나 지루한 이름처럼, 안타까운 사랑의 상처를 지니고 평생을 산다. 12~14살 때 사랑을 나누었던 첫사랑―애너벨―의 죽음 뒤에, 그녀의 환영을 가슴 속 깊이 새겨두었다. 그리고는 그 환영과 비슷한 여자 아이들에게 애칭을 붙인다. (님펫. 아마도 님프(nymph)와 펫(pet)의 합성어겠지.)
험버트는 롤리타의 사랑을 돈으로 산다. 하룻밤을 자면 돈을 주고 롤리타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친절을 베풀 때면 돈을 쥐어줬다. 그런 사랑은 끝내 파멸로 돌아가고 만다.
광고들은 그녀를 위해 태어난 것 같았다. 온갖 더러운 포스터의 주체요, 객체요, 이상적인 소비자였다. 그리고 예쁜 냅킨이나 시골 치즈 샐러드에까지 헝컨 다인의 신성한 정신이 깃들인 그런 레스토랑에서만 식사를 하려고 했다―물론 다 뜻대로 된 것은 아니지만.
그때는 그녀도 나도 뇌물이라는 돈의 위력이 나중에 나의 신경과 그녀의 도덕을 얼마나 황폐화시킬지 미처 생각지 못했다. -p.202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해 주면 동전 한 닢 주지” 이렇게 말하자 그녀는 즉시 손바닥을 내밀었다. -p.283
‘원조교제’가 떠오른다. 나보코프 옹은 알고 있었나 보다. 어린 여자에게 돈을 주고 사랑을 구걸하는 짓은 스스로 노예가 된다는 것을, 서로가 서로의 도덕을 황폐하게 만드는 일이란 것을. 그리도 또 하나, 애들은 돈으로 키우면 안되는 게 확실하다.
원조교제에 푹 빠져있는 중년 남성에게 독서치료 목적으로 읽히면 좋을 것 같다. 돈으로 애들을 키우려는 부모에게 읽혀도 꽤 좋을 것 같고. 고급 포르노를 갈망하는 사람에게도 적절하고, 지하철에서 상당히 불쾌한 눈빛을 느끼고 싶은 사람에게는 최적의 선택이다.
<책에서>
“선생님의 학구적인 명상을 방해하거든 아프게 때려주세요. 얼마나 이 정원을 사랑하는지(그녀의 어조에는 감탄이 없다). 햇빛 아래서 보니 정말 신성하지요(물음표도 없다)”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이 그 밉살스런 숙녀는 풀밭으로 내려서더니 팔을 뒤로 기대고 않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로 그때 낡은 테니스공이 그녀 위로 튀어올랐고 안에서 로의 오만한 음성이 들린다.
“미안해요, 엄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물론 아니지, 내 뜨거운 솜털 같은 연인아. -p.78
내가 미친 듯이 소유했던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 자신이 창조해 낸 것이었다. 또 다른 환상적인 롤리타, 아마도 실제보다 더 리얼한 롤리타. 실제의 그녀와 겹치고 둘러싸며 나와 그녀 사이에서 둥둥 떠다니며 의지도 의식도 없는 소녀, 정말 그건 그녀 자신만의 삶이 아니었다. -p.88
“날 미치게 만드는 건 당신이 그럴 때 무얼 생각하는지 내가 모른다는 거예요” -p.125
나는 죄없는 냅킨을 나도 모르게 접었다가 찢었다가 움켜쥐었다가 다시 찢고 있었다. 하지만 내 미소 띤 얼굴은 그녀를 편안하게 주시한다. -p.126
>> 이런 감정 묘사는 정말 소름이 돋는다.
소위 <섹스>라는 것은 전혀 내 관심사가 아니다. 누구라도 그런 동물적 행위들을 상상할 수는 있다. 그보다 더 의미 있는 노력이 나를 움직인다. 바로 님펫의 위험스런 마술을 영원히 포착하는 것, 그것이다. -p.183
크고 작은 마을의 도서관에서 내가 내밀히 조사한 결혼, 강간, 양녀 등에 관한 책들은 국가는 어린이들의 최고 보호자라는 알쏭달쏭한 말 외에는 별로 알려주는 게 없었다. -p.235
슬프게도 2년간의 괴물 같던 탐닉은 내게 어떤 습관적인 정욕을 남겻다. 공허한 삶 때문에, 나는 학교가 파하고 저녁 시간까지 골목에서 부딪히게 되는 아이에게 유혹을 느껴 갑자기 미쳐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고독은 나를 타락시켰다. 나는 친구와 사랑이 필요했다. 내 가슴은 히스테릭하고 믿을 수 없는 기관이 되고 말았다. -p.351
미성숙이 나를 왜 매혹하는가, 그것은 순수하고 젊고 금지된 요정의 아름다움이 주는 명쾌함 때문이라기보다 많은 것이 약속되지만 거의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음으로 인해 생기는 틈새를 무한한 완전성들이 메꾸어준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결코 가질 수 없는 분홍 잿빛의 위대함이여. -p.360
“죽는다는 것이 아주 두려운 것은 왠지 알아? 완전히 혼자가 된다는 거야” 무릎은 기계적으로 아래위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나는 내가 그녀의 마음속을 조금도 모르고 있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끔찍스런 청소년의 은어 뒤, 그녀의 깊은 마음속에는 정원이 있고, 환혼이 있고, 궁전의 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곳은 내 비참한 몸부림과 누더기같이 더럽혀진 몸은 결코 들어갈 수 없이 금지된 곳, 희미하고 사랑스런 공간이었다. -p.388
이상하게도 흔히 시각보다 훨씬 덜 중요한 걸로 알려져 있는 촉각이 위기의 순간에는 현실을 다루는 유일한 수단은 아니라도 상당히 주요 수단이 된다. -p.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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