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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 파스칼 키냐르문학 2012. 2. 6. 10:51
-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 국내도서>소설
- 저자 : 파스칼 키냐르 / 송의경역
- 출판 : 문학과지성사 2005.05.31
언어langue에 수없이 형용사가 나타나면, 그것은 언어langage가 없다는 기호이다. -p.88
불교 선종에 아주 유명한 화두가 하나 있습니다. 염화미소(拈華微笑)라고 하는 선문답 같은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석가모니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꽃을 한 송이 들어올리기만 하고 아무 말이 없자, 사람들은 우왕좌왕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석가의 수제자 가섭(迦葉)만이 그 뜻을 이해하고 빙그레 웃었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진리를 말하기 위해 말도 안되는 말을 해서 깨닫게 하려 합니다. 불법이 높은 선승들은 이따금, 말로 다할 수 없는 말이 있음을 보여주곤 합니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는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을 쓰게 된 이유를, 둘째는 짧은 동화를, 끝에는 동화를 설명하고 풀이하는 에세이가 묶여있습니다. 이 책에 대해 결론부터 짧게 말하자면,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꼭 봐야 할 책"입니다.
동화는 말할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그림형제의 동화처럼 짧은 이야기에 상징들이 얽혀서 무수한 해석을 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최근의 장편소설이나 장황한 논설로 나오는 책을 보면,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두 가지에 불과한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동화를 쓰게된 의도와 재밌는 동화, 시와 산문을 오가는 에세이 한 편을 통해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은 "생각은 나지만, 입에서 나오지 않는 낱말"을 가리킵니다. 파스칼 키냐르는 작가의, 특히 시인의 고통을 그렇게 표현한 듯합니다.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겪었을 그런 순간을 철학적인 동화를 통해 더 깊은 곳까지 파헤쳐서 끄집어냅니다. 인간과 언어와의 관계, 빛과 어둠,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 기억과 망각에 대한 고찰까지 깊숙히 들어갑니다.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은 언어가 우리 내면의 반사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키신다. 인간은 눈으로 보듯이 입으로 말하는 동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p.66
시(詩)란 오르가슴의 향유이다. 시는 찾아낸 이름이다. 언어와 한 몸을 이루면 시가 된다. 시에 대해 정확한 정의를 내리자면, 아마도 간단히 이렇게 말하면 될 듯싶다. 시란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의 정반대이다. -p.84
인간의 언어는 본능적인 게 아니라 망각을 바탕으로 학습된 것이라는 것, 작가와 시인들은 진정으로 하고픈 말을 하기 위해 적확한 단어를 찾는 끔찍한 고통을 겪는다는 것, 표현된 언어는 그것의 실체와 완전히 같을 수 없다는 것 따위의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다만, 기초적인 언어학 지식이 없다면 쉽게 이해하지 못할 내용이 있습니다. 랑그(langue)와 파롤(parole)에 대한 이야기가 툭툭 나오고, 프랑스 작가 특유의 어원유희(語原遊戱)가 꽤 많이 보이기도 합니다. 3부의 <메두사에 관한 소론>을 좀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 신화를 어느정도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프랑스 아카데미 공쿠르 회장, 에드몽 샤를 루의 추천사 한 마디면 이 책의 소개가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키냐르의 책 한 권을 읽는 것은 다른 책 1,000권을 읽는 것과 다름없다."
<책에서>
글을 쓰는 손은 차라리 결여된 언어를 발굴하는 손이며, 살아남은 언어를 찾아 더듬다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가, 손가락을 앞으로 내밀어 언어를 구걸하는 손이라 할 수 있다. -p.14 <아이슬란드의 혹한>
메두사의 시선과 마주친 남자가 돌로 변하듯이, 떠오르지 않는 단어의 시선과 마주친 여자는 조상(彫像)처럼 굳어진 모습이 된다.-p.65 <메두사에 관한 소론>
모든 꿈은 젖이 없을 때 우리가 불러들이는 어머니의 유방이다. 모든 꿈은 그 자체로 결핍이다. 그것은 비현실의 젖 빨기이다. 그것은 삼중의 과거, 즉 존재했던 적이 없는 과거, 존재했던 과거, 거부된 과거를 기억하는 기묘한 침대이다. -p.76 <메두사에 관한 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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