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두 사람의 자화상
    문학 잡설 2012. 2. 23. 16:56

    <자화상>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를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엊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자화상>

                               윤동주


    산 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이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지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는 건 누구나 다 하는 일이다. 다만, 문인들의 자기 되돌아보기는 그들의 삶의 태도와, 시를 짓는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권영민 교수의 <한국현대문학사>를 읽다가 두 사람의 <자화상>이 사뭇 다르게 느껴져서 나란히 놓고 본다.


      한 사람은 자신의 '시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부끄럽지 않다고 한다.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그의 태도 역시 우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밉기도 그립기도 하다고 말하며 갈등한다. 사람들마다 개인적인 삶과 역사 속 현실의 삶의 비중은 다를 수 있다. 이 두 사람의 <자화상>을 보면서,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이 떠올랐다.


      첫째 유형, 욕망의 사람. 서정주의 첫 시집은 <화사집(花蛇集)>이다. 그냥 쉬운 말로 풀면, '꽃뱀의 노래'. 유명한 작품인 <화사>의 경우도 성(性)에 대한 얘기를 '까놓고' 얘기한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현재형 인간이 아닐까 싶었다. 성 자체가 징그러운 이미지를 갖기도 하지만, 사랑이 가득한 성은 아름다운 쾌락이다. 바바리맨의 출현 대 조인성과의 로맨스의 차이 정도일까. 출발점을 거기에 두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둘째 유형, 고뇌의 사람. 윤동주는 생전에 시집을 낸 적이 없다. 유고 시집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다. 처음 나오는 <서시>의 시작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는 삶'을 노래하는 일이다. 그리고는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다짐으로 첫 노래를 마친다. 참회와 갈등으로 흔들리지만, 다시 자신을 다잡는 의지의 인간 같다. 이 사람처럼, 일제 치하의 세계를 문학과 삶이 일치한 삶을 산 사람도 드물다. 그래서 귀하다.


      서정주는 1915년에 태어나 2000년까지 살았고, 윤동주는 1917년에 태어나 1945년까지 살았다. 한 사람은 오래 살아서 이룬 것도 많았지만, 잃은 것도 많았다. 다른 한 사람은 일찍 죽어서 문학과 삶의 행적 모두를 완전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의 글과 삶을 한 번에 볼 수 있다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한국현대문학사 1 (1896-1945)
    국내도서>시/에세이
    저자 : 권영민
    출판 : 민음사 2002.08.30
    상세보기


    댓글

cpoem_정원사_책들이 있는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