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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 2013. 6. 21. 09:25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비채 | 2013-05-2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무라카미 하루키식 해피 라이프를 엿보다!《채소의 기분, 바다표범...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무라카미 라디오'라는 이상한 제목을 달고 나온 에세이 세 권을 모두 읽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두 번째 책부터 번역되어 나왔고, 첫 번째 책이 제일 늦게 나왔다. 이 책의 특성상 어느 것부터 읽어도 상관은 없다. 그런데 출판사 입장을 생각해보면, 2권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가 성공하자,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를 기획하면서, 흥행이 불안하던 1권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까지 "내보자"라고 생각하게 된 게 아닐까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대체로 분위기가 밝지 않다. 하지만 이 '아저씨'의 에세이는 웃기다. 그것도 꽤 여러 번, 독자의 입가 근육을 위로 들어올리고, 콧구멍에서 바람을 급격하게 빼낸다. '껄껄껄'하고 웃길 만큼 유머로 가득한 건 아니지만, 병맥주 하나 정도 마시면서 읽기에 적당한 웃음이 버무러져 있다.

     

      그런데 그저 맥주 안주거리로만 치부하기엔 영양소가 제법이다. 기본 안주로 나오는 뻥튀기가 아니라, 맛도 영양가도 있는 말린 학꽁치 정도는 된다. 가벼운 이야기를 눈에 담고 곰곰이 굴려보면, 생각해 볼 만한 진액이 흘러나온다.

     

    이탈리아란 나라는 제대로 갖춰입지 않으면 레스토랑에 가도 좋은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오로지 차림새로 사람을 판단하는 나라로, 인격이고 능력이고 그런 건 일상에서 거의 소용없다. 무엇이 어찌 되었건 일단은 외양. -p.10

     

    ... 아마 무슨 이유에서인가 역사적 굴곡의 상징이 되어 브래지어는 뜻밖의 비련에 휩쓸리게 된 것 같다. 불쌍하다. 어찌 되었든 나는 '무엇인가의 상징' 같은 것만은 되고 싶지 않다. 정말로. -p.23

     

      이탈리아에 대한 하루키의 말을 맛보는 순간, 우리나라가 떠올랐다. 평소에도 이탈리아와 우리나라의 유사한 정서에 대해 고민하던 차에, 또 하나 발견한 느낌이었다.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인격이나 능력 따위는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어찌 되었건 일단은 외양'. 그래서 이탈리아 태생의 명품이 많고, 우리나라에서는 명품이 많이 팔리는 건가―하고 생각했다.

     

      이 아저씨는 또 브래지어를 태우며 여성 해방운동을 하는 이야기를 다루면서, '상징'에 대해 말한다. '무엇인가의 상징'이 되는 건 뾰족한 창 끝에 서는 것 같은 일이다. 그런데 어쩌면 좋을까. 무라카미 아저씨는 이미 한국에서 '무엇인가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상징은 되고 싶어서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되기 싫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닌가 보다. 이제 '16억원 선인세' 딱지가 붙었으니, 앞으로 어떤 태그가 더 달릴까.

     

      술렁술렁 읽다보면, 어느새 끝까지 읽어버리게 된다. 짧은 글이 어렵지 않게 씹힌다. 누구나 일상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것들도 있고, 하루키 아저씨처럼 부유한 작가가 되어야 겪을 수 있는 여러 나라에서의 긴 체류경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간극이 큰 사건과 사물을 일관된 시각으로 감칠맛 나게 엮을 수 있는 게, 하루키 아저씨의 밥벌이 능력이겠구나 싶다.

     

      어쩐지 오늘은 TV도 싫고 컴퓨터도 영 내키지 않는다면―. 왼손에는 이 책을, 오른손에는 맥주를.

     

     

    <책에서> 

     

    비행기가 로도스 공항에 가까워졌을 때 갑자기 양쪽 엔진이 딱 멈춰버렸다. -p.33

     

    문득 생각났는데 세상에는 종종 '후렴이 없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얼핏 옳아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전개에 깊이가 없다고 할까, 미로 속으로 들어가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할까……. 그런 사람과 만나 얘기를 나누면 여지없이 녹초가 되고 피로도 의외로 오래간다. -p.51

     

    고양이든 개든 토끼든 뭐든 좋은데, 손 닿는 거리에 동물이 있으면 나는 비교적 자연스럽게 웃는다. 그 사실을 요전에야 겨우 깨달았다. 한 인간이 동물이 있고 없는 데 따라서 그렇게 얼굴 표정이 달라지다니. -p.86

     

    말을 걸어보니 다치가와 고등학교 3학년생이었다.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라고 남자아이가 말했다. "여자친구가 임신했는데 애 아빠가 내가 아니래요"라고 했다. -p.135 

     

    설령 나이를 먹어도 그런 풋풋한 원풍경을 가슴속에 갖고 있는 사람은 몸속 난로에 불을 지피고 있는 거나 다름없기 때문에 그다지 춥지 않게 늙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귀중한 연료를 모아두는 차원에서라도 젊을 때 열심히 연애하는 편이 좋다. …미친 듯이 끌리는 시기란 인생에서 아주 잠깐밖에 없으며 그것은 정말 귀한 경험이다. -p.171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에 '안녕을 말하는 것은 잠시 죽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대사가 있다.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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