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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애와 스타킹
    無序錄 2013. 5. 16. 00:39

      끝나버린 연애는 올 나간 고급 스타킹일지 모른다. 모든 사물과 관계를 처음 맺는 건 잊을 수 없는 경험이다. 신선한 커피콩을 빻아, 끓는 물을 부었을 때 나는 첫 향기. 포장을 뜯고 처음 살갗에 닿는 팽팽한 느낌의 스타킹. 이런 신선함은 절대 잊을 수 없다. 뜨거운 물이 커피에 닿고, 머핀이 부풀어 오르면 그 공간은 금세 커피 향으로 가득차게 된다. 어쩐지 늘어지고, 부어있는 것 같은 느낌의 다리도 새 스타킹을 신으면 금세 탄력을 되찾는다.

      연애, 사랑의 시작도 그렇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사랑에 빠지는 일은, 고급 스타킹의 포장을 뜯고 처음 신었을 때처럼 탱탱한 탄력으로 일상을 감싸는 것과 같다. 분쇄한 커피 가루에 물을 막 떨어뜨리면 순식간에 부풀고, 향기가 빠짐없이 퍼지듯이 생활의 모든 곳에 연애가 스며든다.

      고급 스타킹을 신으면 더 조심한다. 날카로운 물건을 피하고, 가방도 길게 메지 않는다. 손톱, 발톱에도 신경을 쓰고, 걷거나 앉을 때도 신경을 쓴다. 세탁도 쪼그려 앉아 손으로 조몰조몰 빨아 그늘에 말린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조심하고 신경을 쓰더라도 어느 순간 올이 나간다는 점이다. 그것도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길게 풀린 상태가 되어서야 발견한다.

      연애도 민감하다. 처음부터 저돌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일은 극히 드물다. 말 한 마디를 하기 위해서 속으로 천 번을 고민하고 백 번을 되뇌이다, 열 번을 다듬는다. 눈을 맞추고, 손을 잡고, 허리를 감싸고, 입맞춤에 이르기까지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 그렇게 이룬 두 사람의 관계에서 실밥을 발견하지 못하는 일이 많다. 두 사람의 마음에, 길게 올이 나간 뒤에야 발견한다.

      이별은 식어버린 커피처럼, 다시 데워도 처음 그 향은 돌아오지 않는다. 올이 나간 스타킹은 아무리 고급이더라도 다시 기워 입을 수 없다. 섬세함으로 실밥을 찾아 미리 다듬지 않으면, 그 실밥을 시점으로 반드시 기다란 상처가 생기고 만다. 정말 번거로운 건, 언제나 '끝'에는 쓰레기가 남는다는 것과, 혼자 치워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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