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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폰(pawn)의 프로모션
    無序錄 2013. 1. 25. 16:16

     

      체스에서 최강자는 퀸queen이다. 사방으로 체스판을 가로지른다. 앞에 장애물이 없다면, 맞은 편의 끝까지 단숨에 닿을 수 있다. 최후방에서 넓게 바라보다가, 언제든 상대편에 빈틈이 보이면 최전방에 나설 수 있는 힘까지 있다. 넓은 시야와 기동력, 퀸이 체스판의 최강자가 될 수 있는 덕목이다. 하지만 퀸 혼자 64개의 칸을 모두 메울 수는 없다. 그렇게 강력하고 완벽해보이는 능력자에게도 헛점이 있고, 빈틈이 있다.

     

      나이트knight는 바로 이렇게 퀸이 놓치는 칸을 파고든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편 퀸의 시선을 피해서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때로는 암살하는 역할까지 한다. 나이트의 움직임은 일반적인 체스판 위의 말들과는 다르다. 보통의 경우라면, 오로지 앞으로만 간다든가 사선으로만 움직인다.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방어하기도 쉽다. 그러나 나이트의 움직임은 독특하다. 일단 앞으로 한 발 내딛은 뒤에, 좌측 또는 우측의 대각선 방향으로 창을 내찌른다. 게다가 처음 내딛는 칸에 어떠한 장애물이 있더라도 뛰어넘어서 창을 찌를 수 있다. 창끝의 변화와 돌파력. 의외성과 기습이 나이트가 가진 덕목이다.

     

      하지만 나이트에게도 빈틈이 있다. 주변 상황이 어그러지거나, 위태롭게 변화하면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사로잡힐 수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에 내딛는 변화가 커다란 능력이지만, 겨우 '한 칸'의 변화에 그치기 때문에 포위망이 넓어지면 뚫지 못하고 죽고 만다. 포위와 저격의 역할을 하는 말은 룩과 비숍이다.

     

      비숍bishop은 흑과 백, 처음 정해진 자신의 색깔을 지배한다. 언제나 사선에서 대상을 바라보며,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상대편에게 날카로운 비수를 꽂아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이런 능력 때문에 두 가지 실수를 범하기 쉽다. 하나는 자신의 정면과 후면, 바로 옆에 있는 위험을 알아차릴 수 없다. 다른 하나는 한 번 체스판에 발을 디딘 순간, 흑과 백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상대편과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항상 자신만의 색깔을 고수한다.

     

      룩rook은 퀸 다음으로 강력하다. 체스판의 직선 세계를 지배한다. 룩은 높은 탑에 올라 사방에서 다가오는 적을 감시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적들이 방심하고 있는 순간을 발견하면, 지체하지 않고 성문을 열고 뛰쳐나가서 단숨에 섬멸해버리기도 한다. 게다가 룩은 캐슬링castling이라는 기술로, 킹을 보호한다. 킹은 언제나 한 걸음밖에 내딛을 수 없지만, 룩의 도움을 받으면 한 번에 두 걸음도 내딛을 수 있다. 듬직함과 저돌성. 룩이 가지고 있는 덕목이다. 룩은 비숍이나 나이트처럼 의외성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빈틈없는 포위망을 만들어서 킹과 함께 단 둘이서도 적의 킹을 사로잡을 수도 있다. 그러나 룩도 완전하지는 못하다. 정공법에 능하지만, 사선에서 치고 들어오는 계략에는 한 순간에 무너지기 쉽다.

     

      체스판에서 가장 약한 말은 폰pawn이다. 이편, 저편 모두 8개씩, 모두 16개가 체스판 위에 놓이는 말이다. 이들은 오로지 앞으로 한 걸음씩만 내딛을 수 있다. 다만, 맨처음 걸음을 내딛을 때, 강력한 동기가 있다면 두 걸음을 내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때, 크게 내딛은 통로을 상대편 폰이 발견하고 기습해 들어오면 즉시 체스판에서 물러나야 한다―앙파상en passant―. 게다가 바로 코앞에 있는 적을 공격할 수도 없다. 그저 자신의 동료들과 방어선을 구축하거나, 빈틈을 보이며 사선을 노출하고 있는 적에게 기습할 수 있을 따름이다. 폰은 뒤를 돌아볼 수도 없고, 옆을 돌아볼 여유도 없다. 오로지 앞만 보고 걸어야 한다. 우직함. 이것이 폰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덕목이다.

     

      이토록 허약한 폰이지만 우직함의 세례를 받아 체스판 세상의 끝에 이르게 되면, 기적이 일어난다. 매미의 유충이 땅 속에서 5년을 살다가 성충이 되고 매미가 되어 여름의 마지막을 지배하듯이, 세상의 끝에 다다른 폰에게는 체스 종반전을 지배할 수 있는 기적―프로모션promotion―이 일어난다. 가장 강력한 퀸으로 변신할 수도 있고, 룩으로 변신할 수도 있는 권리가 주어진다. 체스의 마지막을 지배하는 건 결국 끝까지 살아남은 폰이다.

     

      가장 중요한 말은 킹king이다. 킹은 자신의 8방을 두루 볼 수 있지만, 겨우 한 걸음밖에 걷지 못한다. 멀리서 다가오는 적들의 모습을 직접 볼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다. 다만, 자신의 곁에 있는 퀸과 룩, 비숍의 보고를 듣고 나이트와 폰에게 명령할 뿐이다. 그러나 킹은 체스판의 중심이다. 그가 쓰러지면 모든 것이 끝장난다. 아무리 많은 수의 적을 사로 잡았더라도, 단 한 순간에 킹이 쓰러지면 그 게임은 끝나고 만다. 킹은 자신의 몸을 스스로 지키면서, 정국을 전반적으로 분석하고 종합해서 통찰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게임의 막바지에 이르게 되면, 킹은 스스로 몸을 일으켜서 적의 숨통을 직접 조이기 위해 움직일 수도 있다.

     

      킹은 자신의 측근이 희생되는 것을 담담하게 지켜보며, 최후의 승리를 위해 전략을 짠다. 어느 누구보다 마음의 고통이 심한 역할이다. 체스판에서 실제로 다투는 것은 퀸, 룩, 비숍, 나이트, 폰이지만 그들을 하나로 모으고 비전을 제시하는 건 킹이다.

     

      킹, 퀸, 룩, 비숍, 나이트, 폰. 여섯 가지 정체성을 가진 말들이 다투는 체스판은 세상과 많이 닮았다. 누군가는 퀸처럼 월등한 지혜와 능력을 뽐내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룩이나 비숍, 나이트와 같은 역할을 하며 세상을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체스판의 폰처럼, 대다수의 사람들은 오늘만 바라보며 그저 우직하게 한 걸음 내딛을 따름이다. 다수의 사람들은 폰처럼, 대부분 무력하다. 뒤나 옆을 돌아볼 여력이 없다. 옆에 있던 동료가 희생되더라도 그저 우직하게 앞으로 걸어갈 뿐이다.

     

      지난 5년간 우리는 폰처럼 걸어왔다. 우리는 지금 체스판의 7번째 칸에 다다른 폰이다.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잠자코 있던 매미의 유충으로 그대로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땅 속에서 썩어갈 것인지, 나무 위로 올라가 수많은 매미들과 함께 숲 속을 소리로 마지막을 지배할 것인지. 결정할 순간이 다가왔다. 퀸이 될 것인가, 가만히 기다리다가 상대방에게 뒤통수를 맞고 스러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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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oem_정원사_책들이 있는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