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기술 | 알랭 드 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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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팡세>, 단장 136. -p.329 <습관에 대하여>
오늘은 오랜만의 휴일. 부처님을 믿지도 하나님을 믿지도 않지만 크리스마스와 석가탄신일에는 꼬박꼬박 쉰다. 비까지 주룩주룩 내리는 이런 날에는 괴나리봇짐이라도 들쳐 메고 길을 떠나고 싶다. 천성이 한 군데 눌러 앉아 있기를 좋아하지만, 이따금 답답해질 때도 있으니, 방랑혼도 내 것이겠지.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지며 나뭇잎이나 꽃잎을 톡톡 칠 때마다 노래를 부르며 유혹한다. 여행, 여행을 떠나기 좋은 날이다.
알랭 드 보통은 아무래도 화성인의 탈을 뒤집어 쓴 금성인이 아닐까 싶다. 아마 이 사람이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에 길을 나서면, 아스팔트 위에 나리는 비 비린내 때문에 인상을 찌푸릴 것만 같다.
<여행의 기술>에는 보통과 함께 떠나는 사람이 있다. 아주 오래 전에 살았던 사람도 있고,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살았던 사람도 있다. 어쨌거나 다 죽은 사람이긴 마찬가지이지만. 보통은 작가나 과학자, 예술가들이 남겼던 책을 한 손에 들고 길을 나선다. 여행을 떠날 때 다른 사람들이 손에 쥐는 “여행 서적”은 제쳐두고, “인문 교양서적”을 손에 드는 보통 아저씨.
관광과 여행의 차이가 드러난다. 많은 사람들은 여행도 바쁘게 떠난다. 휴가를 내고 일정을 잡고 비행기를 예약하고 나면, 어느 순간 비행기에 올라 시속 700~1000 킬로미터로 날아간다. 유적지와 명승지를 빠짐없이 보기 위해 일정을 빠듯하게 꾸려놓고 나면, 안내원의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습니다.”라는 설명에 연방 끄덕이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인스턴트 여행은 관광일 따름이다. 보통 아저씨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많은 준비를 하고 떠나라며 주문한다.
<여행의 기술>은 인문-예술의 실용화 가능성을 보여주는 책이다. 보통 아저씨는 멋진 여행을 위해서 인문학과 예술을 권한다. 우리가 왜 여행을 하려고 하는가, 여행지에 가서 왜 실망하고 마는가, 무엇이 이국적인 것인가―따위에 대한 답변을 인문학과 예술에 기대어 풀어놓고 있다.
플러그 소켓, 욕실의 수도꼭지, 잼을 담는 병, 공한의 안내판은 디자이너가 의도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줄 수 있다. 심지어 그것을 만든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 수도 있다. -p.96 <이국적인 것에 대하여>
보통 아저씨는 예술, 특히 그림의 효용에 대해 얘기한다. 여행지에서 놓치기 쉬운 작은 아름다움을 기억하고 싶으면 그림을 배우라며 넌지시 충고한다. 화가들은 일상적인 풍경에서 보통 사람이 놓치기 쉬운 아름다움을 “추리고 골라서” 담아서 보여주기 때문이란다.
반 고흐가 프로방스에 머문 지 몇 년 뒤, 오스카 와일드는 휘슬러가 안개를 그리기 전에 런던에는 안개가 없었다는 말을 했다. 마찬가지로 반 고흐가 사이프러스를 그리기 전에 프로방스에는 사이프러스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p.264 <눈을 열어주는 미술에 대하여>
세상은 민감한 감수성으로 가득한 마음과 호기심으로 일렁이는 눈빛에만 반응한다. 여행은 민감하지 않고, 호기심이 적어도 우리에게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나트륨이나 칼륨 같은 사건이다. 하지만 일상은 민감하고 호기심으로 가득한 사람에게만 반응을 일으키는 황금이나 백금 같은 원소에 가깝다.
인문학과 예술로 마음과 눈을 닦으면, 자신의 침실조차도 훌륭한 여행지가 될 수 있다는 얘기를 하며 책을 마치는 보통 아저씨. 여름휴가 전에 이 책을 권한다.
<책에서>
행복을 찾는 일이 우리 삶을 지배한다면, 여행은 그 일의 역동성을 그 열의에서부터 역설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활동보다 풍부하게 드러내준다. ……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있지만, 우리가 가야 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p.18 <기대에 대하여>
실제 경험에서는 우리가 보러 간 것이 우리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 때문에 희석되어 버린다. 우리는 근심스러운 미래에 의해 현재로부터 끌려나온다. 당혹스러운 신체적, 심리적 요구들 때문에 미학적 요소들의 감상은 방해를 받는다. -p.43 <기대에 대하여>
훔볼트의 흥분은 세상을 향해 올바른 질문을 가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증언해준다. 그것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파리를 보았을 때 약이 올라 파리채를 휘두를 수도 있고 산을 달려 내려가 <식물 지리론>을 쓰기 시작할 수도 있다. -p.169 <호기심에 대하여>
여행의 위험은 우리가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즉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물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정보는 꿸 사슬이 없는 목걸이 구슬처럼 쓸모없고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된다. -p.172 <호기심에 대하여>
숭고한 장소는 일상생활이 보통 가혹하게 가르치는 교훈을 웅장한 용어로 되풀이한다. 우주는 우리보다 강하다는 것, 우리는 연약하고, 한시적이고, 우리 의지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엇다는 것, 우리 자신보다 더 큰 필연성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는 것. -p.229 <숭고함에 대하여>
어쩌면 어떤 장면에서 무엇을 찾아야 할지 파악하는 감각을 기르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시각 예술을 공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p.252 <눈을 열어주는 미술에 대하여>
“한군데 가만히 앉아 시속 150킬로미터로 달린다고 해서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튼튼해지거나, 행복해지거나,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아무리 느리게 걸어 다니면서 본다 해도, 세상에는 늘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 사람의 기쁨은 결코 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p.303 러스킨 <아름다움의 소유에 대하여>
사람들은 적극적이며 의식적으로 보기 위한 보조 장치로 사진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을 대체하는 물건으로 사용하였으며, 그 결과 전보다 세상에 주의를 덜 기울이게 되었다. 사진이 자동적으로 세상의 소유를 보장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p.305 <아름다움의 소유에 대하여>